
어느 날은 쥐가 많이 아팠다. 사람과 함께 사는 어느 반려견은 주인의 관심을 받으려고 멀쩡한 다리를 절뚝거리기도 한다는데, 실험동물은 웬만큼 아파서는 티가 나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야생성과 생존본능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기력이 떨어진 개체는 케이지를 열고 건드렸을 때 몇 걸음이라도 도망간다. 사료를 바닥에 깔아주면 관심을 갖고 조금씩 먹기도 한다. 하지만 바싹 매마른 채 웅크리고만 있는 쥐들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건드려도 꿈쩍도 못한다. 사료를 뭉근하게 물에 개어 주사기로 먹이면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받아먹는 쥐가 있고, 반면 턱으로 줄줄 흐르도록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는 쥐도 있다. 입 안으로 넣어주어도 삼키질 못한다.
주간 미팅 때 심각하게 아픈 쥐의 상태를 보고하니 안락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때만 해도 뇌조직을 꺼내거나 생물학적 의미를 얻기 위해 쥐를 ‘희생’시켰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 채 쥐를 죽인 적은 없었다. 연구실에서는 안락사를 고려할 만큼 고통스러운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락사 자체가 낯설고 거북했다.
나는 다만 그 쥐를 살리고 싶었기에 하루만, 이틀만 더 케어해보겠다고 요청드렸다. 그것이 쥐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도적 종료시점(Humane endpoint)은 실험동물이 극심한 통증이나 고통 상태에 도달하거나 그로 인해 죽기 전에, 실험을 조기 종료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시점을 말한다. 체중이 20% 이상 감소하거나 기력을 완전히 상실했거나 자극에 반응이 없거나 사료와 물을 섭취하지 못하는 등 회복 가능성이 낮은 상태라면 실험을 종료해야 한다. 실험이 원래 계획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적절한 조치란 치료와 회복 유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설치류 실험에서는 대부분 안락사를 의미한다.
결국 그 쥐는 죽었다. 그때 안락사시켰더라면 덜 고통스러웠을까. 마음 가득 살기를 바랐으나 팍팍하게 식은 사체를 마주하면 속에서 치미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의 무능에 대한 분노도 있고 어느 시간을 함께 했던 생명에 대한 슬픔도 있고 어찌 할 수 없는 무기력도 있었을 것이다. 수술을 더 잘했으면 안 죽지 않았을까. 진통제를 더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수술을 잘했어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그것들을 엉성하게 덮어두고 사체의 꼬리를 집어들면, 손 끝을 타고 온몸으로 불쾌감이 전해진다. 마스크 안에서 미세하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
“Sacrifice? 그건 희생이 아니잖아요.”
선하고 유려한 지적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멍했다. 두려움과 연민을 핑계로 늘 달아났는데 오늘은 도망갈 데 없이 맞닥뜨렸다. 오랫동안 사용하면서도 그 단어의 의미를 한 번도 곱씹지 않았다.
“그렇죠.”
라고 답하고는 테이블 위 허공을 바라봤다. 선배도 박사님도 교수님도 논문들도 다 그렇게 말하던데. 동물실험 필수 교육에서도 실험동물의 생명과 희생에 대한 존중을 배운다. 그냥 그런 비슷한 의미이려니 어렴풋한 생각이 스쳤을 뿐이었다.
희생이 아니잖아요.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자꾸만 들린다.
희생이 꼭 스스로 선택한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전쟁의 희생자도, 재난의 희생자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험동물의 죽음도 희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희생이라는 말은 죽음에 목적과 의미를 덧씌운다. ‘조국을 위한 희생’, ‘과학 발전을 위한 희생’, ‘인류를 위한 희생’. 이 말들은 죽음이라는 피해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앞세운다. 실험동물의 죽음에도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고?
실험동물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는가. 그래 인간이여, 나를 가르고 부수고 헤집어 내 안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가져가라. 나의 피는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짜내어 모든 질병을 정복하고 과학의 발전을 이룩하여라. 라고 하였는가. 그들은 하필 실험동물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실험동물의 자손일 뿐이었다. 오랜 세대에 걸쳐 그저 매일 같은 케이지와 깔짚, 사료와 물, 그리고 자신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거대한 동물을 경험할 뿐이다. 그들의 죽음에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렇다고 ‘죽였다’고 말하는 건 너무 직접적이고 잔인하지 않은가. ‘우리는 쥐를 죽여서 뇌조직을 적출했다.’라고 말하기보다, ‘쥐가 희생되었고 뇌조직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편을 택한다. 수동문은 행위의 주체를 지우고 결과를 보여준다. 쥐를 죽인 인간은 말 너머로 사라지고, 희생된 쥐와 얻어진 조직만 남는다. 그 다음은 그 조직으로 무엇을 밝혀냈는지 이야기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나의 죄의식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동물이 ‘희생된’ 것으로 내가 동물을 죽인 것을 덮을 수 있으니 이 포장지가 참으로 편리했구나 싶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1은 멀리 있지 않았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나치 친위대도 유대인을 ‘죽였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유대인을 절멸시킨다는 계획을 Endlösung der Judenfrage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라고 표현했고, 총살과 가스실 처형은 Sonderbehandlung (특별 처리)라고 표현했다. 의도를 가진 일부가 이런 기만적인 단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관료와 나치 친위대는 이 완곡한 표현을 답습했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으나 애써 마주하지 않은 채 이 같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인간을 죽이라는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수감자에게 총을 쏘면서. 밀폐된 공간에 독가스를 넣으면서. 언어는 행위하는 사람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감각을 교묘히 뒤틀고 진실을 숨긴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 sacrifice, 희생이라는 표현은 점점 덜 사용되는 추세다. 대신 euthanasia, 안락사가 더 흔히 사용되고 있다. Euthanasia는 그리스어 eu (good), thanatos (death)에서 온 말로 ‘좋은 죽음’, ‘고통 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희생으로 가리지 않고 마주하게 함으로써, 연구자는 실험동물의 안락한 죽음, 고통을 최소화한 죽음에 대해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험동물의 죽음을 정말 ‘좋은 죽음(euthanasia)’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실험동물이 죽음의 과정에서 정말 안락한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의식을 잃기 전까지 가능한 한 고통과 공포,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의식을 확실히 소실시킨 뒤 회복 없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지만, 동물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부러 ‘The mice were killed’라는 표현을 쓴다. 희생이라는 의미를 거두고, 안락사라는 완곡한 표현도 거두고, 죽음이라는 사실을 남긴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