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세대 이민자 동양인 여성퀴어 유부녀의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다. 3주 전에.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다. 별일 없다면. 현지인들에게 이민 왔다고 말하면 “왜 하필 아무것도 없는 여기로…?” 하는 의문이 강하게 비친다. 아내와 법적 가족이 되기 위해 미국으로,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에 이 도시에 왔다고 대답한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다.
너무 어려워! 이름을 외우다가 과부하가 왔다. 아내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만나자고 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인척이며 친구들이며 단기간에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아내가 성격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인망이 두터울 줄이야.
시차 적응 안 된 몸과 외국어로 하는 사회생활. 계속되는 바쁜 일정에 결국 탈이 났다. 피부가 뒤집어지고 위장이 멀쩡한 날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옷 챙겨 입고 나가서 “안녕하세요, 와이프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다녔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덜 외롭고 도움 한 번 더 받는 걸 알았다. 요일? 시간?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차에 타면 졸고, 내리면 인사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 결혼했구나. 올해 아홉 살이 된 처조카의 가라테 승단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을 때였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헐ㅋㅋ 나 진짜로 결혼함ㅋㅋ ]
어안이 벙벙할 새가 없었다. 며칠 뒤에는 교회에 갔다. 무려 부활절 맞이 성가대 특별공연. 아버님을 응원하러 갔다. 이른 아침에 단정한 옷을 입고 졸지 않으려 애썼다. 예배 후에는 아버님 목소리만 들린다고 다음번에는 솔로 파트 하나 하셔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며느리적 행동–말로 때우기–이다). 아내가 어릴 적부터 산 동네라 교인끼리 서로 다 알고 지내는 듯했다. 어르신들이 다가와 너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아내는 나를 “wife”라고 소개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옆의 떨리는 입꼬리와 잔뜩 굳은 어깨. 웃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부부라는 걸 숨기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환영받는다는 감각이 어색했다. 한국에서는 길에서 손잡는 것 하나도 눈치 보고 살았는데. 그렇게 동동거리고 날 세우던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했다. 공동명의 신용카드와 통신사 가족결합 혜택과 병원 보호자 등록.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았고 친절했다. 아내는 웃으며 스몰토크를 하고 나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동성커플도 참여할 수 있나요?” 서울의 어느 구청에서 신혼부부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수업내용이 너무 좋아 보여서 듣고 싶었다. 강사님은 친절했고 2주간의 수업은 알차고 즐거웠다. “동성커플도 진행하시나요?” 웨딩사진을 찍었다. 연애초부터 점찍어둔 웨딩 포토그래퍼가 있었다. 작가님은 친절했고 게이친구가 있다는 말도 해줬다. 한국에서도 부부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럴 때면 너무 좋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놨다.
한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상냥한 사람들이 호의를 베푼 거라고.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미래를 꾸리고 싸우고 키스하는 나날과는 상관없다고. 거둬간다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삭제될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더 떠들어댈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진짜로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자꾸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이민을 왔다. 호의에 기대어 사는 삶, 수치심이 그걸 자꾸 휘적였다. 비자(영주권)를 준비하며 힘들 때면 아내가 미국인이니 남들보다 수월한 상황이라며, 감사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2년 동안 진짜 부부라는 것을 증명하며 살았다. 보통 혼인관계 증명서, 공동명의 서류, 거주지 증명 서류 같은 문서를 제출한다. 우리는 동성 부부라 한국에서 결혼할 수 없었다(아내가 외국인이라서 혼인신고를 하고 불수리 처분을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동명의 재산도 없었다.
같은 주소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자. 아내가 한국 내 외국인을 담당하는 부서에 집 주소를 등록했지만 등본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해결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다. 여러 직원이 모여 문제를 알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무슨 사이인지, 그런 게 왜 하고 싶은지 질문이 많았다. 우리 사이를 눈치챈 표정. 호기심과 혐오감이 뒤섞인 익숙한 표정. 제각기 얼굴이 달라도 표정은 하나였다. 언제나 그랬듯. 끝없는 기다림의 결론은 주민등록등본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소가 나왔다.
속눈썹 위에 쌓인 굴욕이 볼까지 흘러내렸다. 끊임없이 진짜임을 증명해야해. 거절당해도 계속해야해. 남은 방법은 연민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가족과 친구를 총동원해 지지 진술서를 제출했다. 말 그대로 우리를 지지하며 위장 부부가 아니므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서류이다. 우리 부부를 언제 만났는지, 같이 무얼 했는지 소상하게 적힌 손글씨. 한 목소리로 쟤네는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말하는 문장들. “담당자님, 안녕하세요”로 시작해서 “잘 부탁드립니다”로 끝나는 편지같은 글을 밤새 읽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의 존재를 진짜라고 인정 해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결국에는, 미국. 미국. 미국.
희망에 찬 무력감을 지나 미국에 도착했다. 법적 부부라는 신분의 달콤함에 빠졌다. 그리고 이해했다.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 간의 은근한 서열이 어디서 왔는지. 시민권자와 결혼해서 “개꿀빠는” 여자들에 대한 무시가 어디서 왔는지. 내 존재가 진짜니 가짜니 감상 젖은 타령이나 할 수 있는 것도 복에 겨운 것. 내가 아내 옆에서 외국어로 빚어진 친절과 결혼 축하에 얼떨떨하게 서있는 동안 핸드폰 개통을, 은행 계좌 발급을, 보험 서류 제출을, 렌트 구하기를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쉽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느 저녁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미 세 번이나 설명해 준 보드게임 규칙을 이해 못 하거나 모두가 웃고 있는 농담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할 때는 조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 때문에 끊긴 흐름속에 “야, 내가 한국어 할 때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야.” 너스레를 떨었다. 민망함을 감춰보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다들 와하하 웃는데 고등학생 때 이민 왔다던 친구만 조용히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식탁 한켠에 김치를 꺼내두었다. 밤늦게 대충 차려먹는 끼니인데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유난히 허기졌다. 문득 드는 생각, 이 동네 다른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여기는 진짜 여행으로나 갈 곳이지 살 곳은 못 되네요. 동양인이 너무 없어서 길거리만 걸어 다녀도 쳐다봐요. 저는 관광지만 다녔는데도 적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네요. 어딜 가든 백인밖에 없어요.” 스크롤을 멈췄다. 첫 번째로 클릭한 글에 가감 없이 솔직한 감상이 있었다. 문득 식당에서 마주쳤던 아기가 생각났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할 만큼 어린 아기가 나를 너무나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느꼈다.
네가 처음 본 동양인이구나, 내가. 새파란 눈에 떠오르는 두려움. 외계인이라도 마주친 것 같은 표정.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의 인종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열에 아홉은 백인이었다. 동양인은 일부러 아시안 식료품점에 가지 않는 한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만큼 다른 곳에서는 몇 배로 튀었다. 이렇게까지 너무 쉽게 눈에 띄는 줄은 몰랐다.
어딜 가든 멀끔하게 다니기 시작했다. 다림질 된 옷과 립스틱은 필수. 급하게 나가야할 때도 차려입었다. 사람들이 날 무시할 건덕지를 하나라도 없애고 싶었다. 백인 동네의 젊은 동양인 여자란 무시당하기 딱 좋은 조건이니까. 함부로 웃지 않았다. 예의상 하는 미안하다는 말도 입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여권을 꼭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신분을 증명해야 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이민국 단속반에 구금되는 사례가 늘었다. 유색인종이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체포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매일 뉴스에 나왔다.
끝없이 치솟는 불안. 동행하는 백인 없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잠을 자도 피곤하고 식욕이 없어졌다. 한동안 그러던 중, 갑자기 구운 고구마가 먹고 싶었다. 온갖 마트를 뒤지다가 마지막으로 간 곳에서 겨우 찾았다. H마트. 해외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한인마트였다. 3년 전 이 동네에 여행 왔을 때는 중국인 마트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 H마트가 생겼다.
망원시장 밖에 파치만 모아서 파는 청과물 가게가 있었다. 달러가 얼마나 비싼데 미국 가기 전에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한다고 거기서만 먹을 걸 샀다. 추운 날씨에 얼었다가 녹아서 물러터진 딸기. 바짝 마르고 생채기 가득한 고구마. 한입 베어물면 방 안에 흐르던 따끔따끔한 침묵. 잠시 회상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고구마 사이로 덥석 손을 넣었다. 하나하나 만져가며 제일 통통하고 상처 없는 것들로 망설임 없이 골랐다.
미국 중부 어드메에서 자랐겠지만 어쩌면 한국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고구마. 껍질의 흙이 손가락에 묻어나는 게 위로가 됐다. 아, 우습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그동안 얼마나 비웃었는데. 그런데 여기에 와서야 어깨가 풀어졌다. 그동안 온갖 불안과 긴장을 얹고 다니며 숨을 참고 있던 걸 깨달았다. 고작 손가락 세 개만 한 고구마에. “한국 고구마”라고 한글로 쓰여있는 가격표에.
-화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