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자리는 언제나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 담배연기에 잔뜩 예민해진 채로 숙제를 했다. 자영업자 자식의 숙명이었다. 미군 부대가 있는 동네,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동네, 히잡 쓴 여자들이 다니는 동네. 낮에는 건달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밤에는 유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은 동네. 그시절 이태원. 나는 하리수 씨가 데뷔했다는 트젠바 옆 호프집 딸내미였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이유: 피아노 정도는 있는 집에 시집가길 바라서
엄마가 나에게 영어를 가르친 이유: 일년에 한번 정도는 해외여행하며 살길 바라서
그러니까 내가 이태원의 미군 부대에 들락날락 거리던 건 엄마의 소원을 실현하던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거기도 미국 소유 땅이잖아. 부대 입구의 검문소, 우리는 모두 미니스커트에 하이힐 차림이었다. 조막만한 아시안 여자들이 건장한 미군 옆에 붙어 한 명씩 신분증 검사를 받았다. 겸연쩍은 마음에 옷 매무새를 고치는 척 고개를 푹 숙이면 매끈한 다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숨막혀. 인천에서 처음 열린 퀴어 페스티벌에 갔다. 밀려오는 혐오세력과 물러서지 않는 경찰의 방패 사이에 짓눌리고 있었다. 밭은 숨을 간신히 뱉었다. 몇 시간 전까지는 사랑을 외치던 입이었는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르던 호칭들. 더럽고 찐득이는 말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깔끔하게 떼어내지 못한 견출지처럼 내 몸 어딘가에 붙어있다. 혐오발언을 들으면 맞았던 자리가 번쩍인다. 여기 맞았어요! 하는 것 처럼.
영.광. 입천장 뒤의 연구개에 닿는 혀 뒷부분. 공기를 코로 보낼 때 울리는 소리가 두번이나 연속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길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야 말로 영광이란다. 연달아 울리는 진동이 너무… 거창하고 멀었다. 나는 그냥 마음맞는 여자랑 길에서 손잡고 다니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여자를 어디서 만나야해? 데이팅 어플을 깔았다.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으로 얼굴도 신상도 다 깠다. 호모포빅한 국가의 폐쇄적인 여성 퀴어 문화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순진한 믿음이 박살났다. 익명 대 익명으로 만난 무작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도덕적 기준을 가졌을거라는 것.
아! 너무 피곤하다!
그냥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기로. 괜스레 민망한 마음이 드는 옷을 입을지라도 길에서 편하게 손잡고 걷기로. 그렇게 만나고사귀고헤어지고썸타고깨지고동시에몇명을만나고들키고다른사람을만나고꼬시고꼬셔지고맞고때리고울고아무일도없던척.
스토킹 수위가 심해져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탓하는 말도 들었다. 짭새 새끼들이 그럼 그렇지. 막막한 마음에 술을 마셨다. 보드카를 물처럼 마신 덕에 앉아있는데도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나 지금 진짜 별로다. 진짜, 진짜로,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다음날 일어났을 때 이상하리만큼 숙취가 없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하고 머리가 맑았다. 주방가위를 들고 냅다 머리를 잘랐다. 몇 개비 피우지 않은 담배갑을, 자기 전에 마시려고 협탁 안에 숨겨둔 술병을 죄다 버렸다. 그리고 데이팅 어플을 삭제했다. 지나치게 거창한 마음도 망설임도 없었다. 정해진 루틴을 수행하듯 담백한 움직임.
올해는 우정에 집중해야지. 술을 끊고 반타작 난 인간관계를 돌아보며 다짐했다. 퀴어 친구를 만들기로 했다. 이성애자보다는 그쪽에 조금 더 유대감을 느꼈다. 여성퀴어 대상 어플을 깔았다. 데이팅 어플 형태이지만 찾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연애상대를 찾는다고 표시해둔 사람은 패스했다. 친구를 찾는다고 표시해둔 사람은 무조건 관심을 보냈다. 결론적으로 두 명의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한 명의 애인도.
좆됐다.
그것이 나의 첫 감상.
걸어오는 그의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니 저거 후광일지도… 우리는 녹사평역 근처의 태국 식당에 갔다. 잔뜩 긴장해서 맥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1년 후, 거기서 조금 걸으면 있는 미국식 다이너에서 기념일을 축하했다. 고향 음식 먹으니 좋아? 실없는 농담을 했다.
건너편 퀴논길에 장식된 연등 아래를 걸을 때는 손을 놓지 않았다. 드랙쇼를 보러 게이힐에 갔고 우리가 좋아하는 드랙퀸에게 결혼 축하를 받으며 엄청 좋아했다. 이태원에 미군부대가 처음 들어왔을 때 생겼다는 술집에 가서 취한 채로 컨트리 음악에 춤을 췄다. 허기지면 큰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케밥집 중 아무데나 들어갔다. 같이 있어서 좋아. 호선을 그린 입술 옆의 보조개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면 더 깊게 파이는 보조개.
이태원역에서 한강진역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아쉬우니까. 데려다주고 뒤돌아가는 사람은 더 아쉽고 헛헛했겠지. 엄마는 누구한테 맨날 이렇게 꽃다발을 받아오냐고 했다. 그래서 꽃다발을 사준 사람을 데려왔다. 어딜가나 싹싹한 사람이었고 같이 있으면 내가 편안해보이니 가족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싫었어도 할머니가 유독 좋아했기 때문에 딴지를 걸 수 없었겠지. 그렇게 우리는 더 자주 함께 집에 왔다.
병원에서 서로를 보호자로 등록하고 싶어. 직장에서 편하게 배우자 이야기를 하고 싶어. 언제든 당연하게 함께할 거라고 믿고 싶어. 그냥 우리끼리 좋아서 같이 지내는 거 말고, 단단하게, 법적으로 묶이고 싶어.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관계 말고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헤어지려면 복잡하고 피곤한 관계가 되고 싶어. 결혼하고 싶어. 미국에서.
원래 거기는 내가 숙제를 하던 호프집 옆 슈퍼였다. 카페의 동그란 테이블에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앉은 세 사람. 그 사이에 침묵만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엄마였다. 난 그냥 네가 행복하면 돼. 지난 십여년간 엄마에게 받아온 질타와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던 커밍아웃이 조금은 상쇄되는 기분이었다.
여행을 앞두고 들떠있는 단체 관광객이 왁자지껄 떠들며 크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그 옆에서 티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 영어 가르치는데 엄마가 돈 깨나 썼잖아. 뿌린대로 거두는 거야, 그거 써먹으려고 나가잖아. 나는 우는 사람 위로하는 데는 영 재능이 없어서 되도 않는 농담이나 했다. 고개를 들 기미가 없는 엄마 뒤로 공항 벽을 가득 채운 전광판에 향수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앞치마를 맨 채로 손이 기억하는 멜로디를 따라가던 엄마의 모습이 선하다.
덮인 눈꺼풀 안에서 엄마는 무얼 보고 있었을까? 진짜로 피아노를 배워서 피아노 있는 집에서 산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지금보다 영어를 못했어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을지 잠시 의문을 갖는다. 옆자리에서 잠든 아내의 손을 꽉 잡아본다. 둥근 창문을 열고 내다본 밖에는 밤하늘이 가득하다.
화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