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나라로 도망쳤다] 1. 지쳤다.

새벽 4시가 되면 다들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며 이따 보자고 인사한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씻고 잠깐의 눈을 붙이고 나면, 몇 시간 뒤에 똑같은 얼굴들이 사무실에서 오늘 하루도 힘내자고 이야기한다. 이 짓을 반년을 했다. 프로젝트 동안에는 제발 프로젝트가 끝나길 빌었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는 반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한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는 프로젝트였다. 설계, 개발 일정, 업무 플로우 모든게 정해지지 않고 계속 변경됐다. 그러니 아무도 웃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고객은 화를 내고, 직원들은 예민하고, 날카로운 말들이 서로를 갉아먹어 건강한 이가 없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다들 지쳤다. 그리고 다음 해 연봉협상. 다들 고생을 했으니 기대하는 바도 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원래는 동결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인정받는 느낌은 받아야 하니까 100만원 올려줄게. 과장승진? 그건 내년에 생각해보자”

100만원?

다들 탱자탱자 놀면서 주간보고에 뭐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할 때, 우리 팀은 새벽 4시까지 매일 고생했는데, 돌아오는게 고작 이거라니. 

그만두자. 

원래 회사는 직원을 책임지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근데 그만두면 이제 뭐하지?

사실, 몇 년 전 부터 해외에 나가고 싶었다.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던것도 아니고, 영어를 대단히 잘하는것도 아니지만 그냥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놓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아둔 돈도 없었고, 내가 진짜 해낼 수 있을까?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문득 퇴사를 마음 먹으니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특이하게 연봉협상을 3월에 한다. 덕분에 상반기는 워홀 정보를 찾아보느라 지나갔고, 하반기는 실제로 결핵검사, 보험료 결제, 비자 신청 등을 하느라 바빴다. 보험료가 생각보다 꽤 비싸서 순간 망설였지만, 앞뒤 재지 않는 성격 덕분에 그냥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신청했다.

이 시기에 나는 번아웃 상태였다.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니, 깨어있는 상태에도 뇌가 자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조금씩 영국 회사에 지원은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다른 지원자와 함께하게 되어 아쉽지만 귀하는 탈락하셨습니다.”

탈락 메일의 연속. 처음에는 꽤 충격을 받았지만, 점차 오 또 탈락했네?! 하고 웃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퇴사하지 말고 휴직 처리 해줄테니 갔다 돌아오라고 말했다. 솔직히 감사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꽤 구미가 당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영국에 와서도 나태하게 지내다가 그냥 다시 한국가지 뭐 하고 돌아갈 것 같았다. 내가 원한건 그런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영국에서 살아갈 퇴직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하고 퇴사일자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절대 퇴사가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퇴사 다음날에 여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마무리 하기 좋은 날. 12월 마지막날.

그렇게 나는 거진 7년을 다닌 회사를 퇴사했다. 퇴사날에는 그렇게 울음이 나왔다. 떠나는 나를 위해 따뜻한 말들을 얹어주는 동료들과 오랜 기간 함께했던 곳을 떠난다는 기분 때문에. 시간이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갓 대학을 졸업한 나로. 

이제 백수다.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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