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찾아서 01_부사장님

밤 늦도록, 살신성인(殺身成仁), 야근을 하고 있는데 돼지고기에 소주를 저녁 삼아 드시러 갔던 부사장님이 홀로 복귀하시다. 앗!
어쨌든, 나의 야근은 계속된다. 일이 너무 많다. 오늘 밤 늦도록 일하지 않으면 주말에 일하러 나와야 될 판이다. 참, 사람 나고 일 났지, 일 나고 사람 났냐! 팔자 좋은 소리. 일 나고 사람 났다. 에라이!
한참 일하는데 부사장님이 말을 시킨다. 엥? 이쪽에 나와서 나를 보고 말씀을 하시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픈 허리 때문에 아픈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찌 부사장님 말씀을 주저앉아 들으리. 질문 또는 대답인 것 같던 대화가 이윽고 부사장님의 포부 발표회가 된다. 백 억, 천 억, 이천 억, 엠앤에이가 어쩌고 저쩌고, 이 회사도 사고 저 회사도 사고…. 들으면 입이 딱 벌어질 말씀을 하시니 참 포부가 당차시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회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회사의 미래. 물론 나도 알고 싶기도 하고 신경 쓰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기엔 밤이 너무 늦었고, 나의 다리, 허리는 아프며, 나는 주말에 사무실 나와서 일하지 않기를 바라며 금요일 밤 늦도록 야근을 하는 처량한 신세일 뿐이다. 참으로.

선수는 왜 선수인가?
연애를 잘 걸어서 선수가 아니다.
연애를 걸어서 성공률이 높다고 선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유혹이고 무엇이 유혹이 아닌지 알면 선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선수다.
부사장님은 오늘 선수의 예민한 촉각을 흔들고 계시다. 로맨스그레이 부사장님. 부사장님과 연애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연애의 스릴을 거부한다. 내 입에 들어가는 밥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하나 있는 애인에게도 나누어 줄 시간이 부족해 허덕인다. 혼자 있고 싶기도 하고 애인도 보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고 조용히 음악을 듣고 싶기도 하고. 혼자 생각에 잠기고 싶기도 하고 엄마 얼굴도 보고 싶고 동생도 궁금하고. 글을 쓸 시간이 없어 미칠 것 같은데 애인과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같이 보내야 이게 또 성의 있다 할 수 있겠고. (난 성의 있는 애인이고 싶다.)

물론 로맨스그레이 부사장님은 나한테 코딱지만큼도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그러나 그렇다면 그 늦은 시간에 포부 발표회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았으리라. 단 둘만 있는 사무실에서 얼굴 맞대고 대화하자고 하시지는 않았으면 좋았으리라. 내가 상당히 아줌마스럽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식적으로 미혼이자 40을 바라보는 중늙은 아가씨다. 나는 모든 여/남, 여/여, 남/남(까지는 그닥 아니지만) 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 나이에 순진한 아가씨인척 하고 싶은 마음은 나야말로 손톱만큼도 없다. 나는 누구를 믿는다든가, 누구는 그럴 줄 몰랐다든가, 뭐 그런 식의 순진무구한 멘트를 날리는 건 이 나이에 토 나오는 짓, 양심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느끼는가, 어떤 반응을 원하는가, 또는 기대하는가, 나에게서 무엇을 느끼는가, 나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가, 저 말 뒤에 숨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좋은 느낌인가, 나쁜 느낌인가? 미숙한 느낌인가, 성숙한 느낌인가? 뭔가 알고 뭔가를 요구하는가, 아니면 자기가 발사하는 메시지가 무언지 스스로도 모르는가?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나의 촉각은 제멋대로라서 ‘늘’ 곤두서 있지는 않다. 어떤 상대는 턱없이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걸 알게 되면 그때는 큰 코 다친 뒤이므로 반성한다. 반성하고 반성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아직도 반성은 부족하다.

오늘도 야근했다. 다들 가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 부사장님은 또 어느 회의에서 혼자 복귀하셨는지, 밤늦게 들어오셨다. 마무리, 마무리, 급마무리. 내 아무리 일 나고 사람 났어도, 지금, 여기, 혼자, 계속, 있으면, 나야말로 부사장님에게 모종의 사인을 보내는 거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거절은 깔끔하게. 나는 급 마무리를 하고 부사장님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코딱지만큼도 내게 관심 없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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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