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성폭력 사건 및 가해자를 공개합니다

20121101_한국레즈비언상담소_알림.pdf287.9K [알림]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성폭력 사건 및 가해자를 공개합니다

순 서
1. ‘어지(차라) 성폭력 사건’ 개괄
(1) 사건 경위
(2) 피해 내용
1) 피해자 A
2) 피해자 B
3) 피해자 C
4) 피해자 D
 
2. 왜 성폭력인가, 어떤 성폭력인가
(1) 해당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근거
(2) 해당 성폭력의 특징 및 맥락
1) 가해 행위의 상습성
2) 가해 이후의 사건 무마 노력
3) 관력 관계에 기반을 둔 행위
4) 여성주의자/성소수자 인권운동 활동가로서의 자기모순적 행위
 
3.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징계 사항
(1) 조치 세부 사항
1) 피해자 활동 (가능) 공간에 대한 접근 금지
2) 사건에 대한 비밀 유지 요구
3) 사건에 대한 재규정 금지
4) 가해자 교육프로그램 이수 요구
5) 가해자 사과문 작성 요구
6) 사건 관련 지출 비용에 대한 가해자의 직접 부담 요구
7) 조치 및 징계 사항에 대한 이행보고서 제출 요구
8) 가해자 사과문 및 활동명 공개
9) 위 조치 및 징계 사항에 대한 가해자-한국레즈비언상담소 간 서약서 작성
(2) 징계 사항
1) 준거 회칙 검토
2) 전체활동가회의(2012년 9월 23일) 논의
3) 임시총회 소집 및 징계안 가결: 제명
 
4.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입장
(1)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징계에 관하여
(2)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에 관하여
(3)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를 결정하기까지의 고민들
(4) 단체의 약속

1. ‘어지(차라) 성폭력 사건’ 개괄
 
 
(1) 사건 경위
 

  내용
 
세부 내용
 
2012. 8. 14 피해자 A의 신고
피해자 A가 상담소 활동가와의 대화 중 가해자 ‘어지(차라)’로부터 입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언급함. 당시 활동가는 이를 성폭력 피해 신고로 받아들이고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함.
 
2012. 8. 16.

피해자 A 면담
 
 


진술 확인
사건조사 및 공개여부 확인 동의 절차: 상담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하고 전체활동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다루기로 결정함.
피해자보호를 위한 조치 확인: 가해자가 상담팀 활동가이자 2012년 9월부터 상근활동가(간사)로 일할 예정이었으므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 분리가 시급하였음. 가해자 접근(연락) 금지, 활동 중단 등의 필요한 조치에 대해 피해자 A와 협의함.
 
2012. 8. 17.

가해자 1차면담

 


가해자에게 사건 접수 사실 및 조사 사항 통보
가해자 진술(추가 가해사실 포함): 가해자는 피해자 A에 대한 가해 사실은 부정하면서 피해자 B, C에 대한 가해 사실을 떠올려 진술함.
가해자에게 피해자와 상담소에 대한 접근금지 및 활동중단 요구
 
2012. 8. 18. 전체활동가회의에서 신고내용 및 면담내용 공개(피해자 신원은 비공개)
2012. 8. 22.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구성 및 사건조사 개시
2012. 8. 27. 추가피해자 확인 피해자 B, C의 피해사실 진술.
2012. 8. 31. 가해자 진술서,
서약서 요구

피해자 보호를 위한 비대위 요구사항 이행에 대해 가해자가 서면으로 약속함. 가해자에게 사건 정황에 대한 서면 진술서를 요구함(가해자 2차 면담).
 
2012. 9. 5. 추가피해자 확인 피해자 D의 피해사실 진술.
2012. 9. 9.-13. 피해자 진술서 제출 협의, 피해자 요구사항 접수
2012. 9. 13. 진술서 대조,
가해사실 확인

가해자가 피해자 A, B, C에 대한 가해 사실을 모두 인정함. 피해자 D에 대한 가해사실은 일부 부정함(가해자 3차면담).
 
사건 조사 종료
사건 조사 종료.
피해자 D에 대해 진술이 불일치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추가적인 사실관계 입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함.
 
2012. 9. 20. 가해자의 사과문 작성 피해자 A, B, C, D 및 상담소에 대한 사과문 작성.
2012. 9. 23.
전체활동가회의에서 가해자 징계 내용 및 징계 절차 논의
가해자 징계 의결을 위한 임시총회 소집 결정
가해자에 대한 요구 사항 구체화 및 확정
 
2012. 9. 25. 임시총회 소집
2012. 10. 6. 임시총회 개최 가해자 ‘어지(차라)’에 대한 제명 가결.
2012. 11. 1. 현재, 가해자 사과문(3차 수정) 및 2차 이행보고서 수령

 
 
(2) 피해 내용
 
아래 피해 내용은 피해자들의 진술 사항을 토대로 마련한 요약본입니다. 가급적 구체적인 정황을 담되, 사건 이해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항 이외의 부분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술을 삼갔습니다.
 
1) 피해자 A
2012년 O월 O일, 가해자 ‘어지(차라)’와 피해자 A는 회원모임을 마치고 차가 끊겨 상담소 사무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피해자 A가 자려고 하자, 가해자는 피해자 A에게 “손을 잡아도 되나요” 등의 질문을 하며 신체적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피해자 A는 거절하면 어색해질 것 같은 마음에 가해자의 요구에 응하였는데, 이후 가해자는 성폭력을 가했습니다. 다음날 가해자는 피해자 A에게 “너를 좋아한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여 피해자 A를 더욱 위축되게 하였습니다.
 
2) 피해자 B
2011년 O월, 가해자 ‘어지(차라)’와 피해자 B, 가해자의 지인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던 중, 가해자가 갑자기 피해자 B에게 뽀뽀를 했습니다. 피해자 B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며 “이게 무엇이냐”고 말하자 가해자는 “좋아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술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장난처럼 여기고 웃어넘겼습니다.
 
3) 피해자 C
2011년 O월, 가해자 ‘어지(차라)’는 피해자 C에게 갑작스레 만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피해자 C는 당황스러웠으나 고민 상담이나 받을 겸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함께 술집에 가려는데 영업시간 전이라 문이 닫혀있자, 가해자는 피해자 C에게 근처 DVD방에서 영화를 보며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DVD방에 가자, 가해자는 피해자 C에게 가까이오라고 하더니 30분쯤 지났을 때 일방적으로 성폭력을 가했습니다. 이후 가해자는 피해자 C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내가 아끼는 OO에게”, “앞으로 잘 지내자” 등의 표현이 담긴 편지를 주는 등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4) 피해자 D
2011년 O월, 가해자 ‘어지(차라)’는 피해자 D에게 교제를 원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피해자 D는 문자에 “만지고 싶다”, “안고 싶다” 등의 성관계와 관련된 표현이 있어서 희롱을 당한다는 생각에 매우 불쾌했습니다. 얼마 후 가해자는 피해자 D와 함께 회원 세미나를 하다가 자료를 읽던 중 ‘섹스’라는 구절을 손으로 짚으며 피해자 D에게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피해자 D는 앞의 일이 있었던 터라 또 희롱당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2. 왜 성폭력인가, 어떤 성폭력인가
 
 
(1) 해당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근거
 
상담소는 2001년 (당시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 이하 <끼리끼리>) 여러 여성이반 모임들과 연대하여 여성이반 커뮤니티 내의 성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여성이반 커뮤니티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연대 <반성폭력네트워크>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관련 사례 수집 과정을 거쳐 여성이반 反성폭력 매뉴얼 <성폭력 이제 그만> (2002-2003)을 제작, 배포합니다. 이는 여성이반 커뮤니티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의 피해를 포착하고, 가해를 드러내고, 성폭력이 발생하는 데 일조하는 문화적 습관들을 바꾸고 고치는 데에 필요한 제안들을 담은 소책자이지요. 2004년에는 최초의 매뉴얼을 보완한 <성폭력 이제 그만 2>가 발간됩니다.
 
이같은 연대체 결성 및 매뉴얼 발간은 여성이반 커뮤니티가 각종 권위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정지역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판단 및 자성을 널리 나누고, 이 공간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조건으로 인해 더욱 스스로 언어화하거나 직면하기 어려워 해온 문제인 성폭력을 실질적으로 살펴 예방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이후 상담소는 신입회원들에게 배부하는 자료인 ‘단체 내 에티켓’ 및 정회원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된 ‘反성폭력 세미나’ 등을 통해 <끼리끼리> 시절 시작된 <반성폭력네트워크>의 문제의식을 꾸준히 이어옵니다. 이 과정에서 ‘단체 내 에티켓’과 <성폭력 이제 그만 1, 2>의 내용은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 성폭력을 대하는 상담소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번 ‘어지(차라) 성폭력 사건’에 대한 상담소 내 비대위의 입장, 나아가 상담소 전체의 공식 입장 역시 위의 두 자료의 내용에 담긴 성폭력에 대한 정의를 기본으로 따릅니다. 다음 인용문은 <성폭력 이제 그만 2> (2004) 중 무엇이 성폭력인가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성폭력은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해지는 일방적인 성적 행위입니다. 즉, 상대방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가 성폭력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난 일이 바로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일이냐, 하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그건,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의 주관적인 느낌에 달려있습니다. 피해 당사자가 느끼는 성적 수치심 및 불쾌감은 그 수위와 상관없이 그 당사자가 놓여있었던 상황이 성폭력 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이는, 가해자가 아무리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는 식으로 발뺌을 하려해도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한다면 가해자의 성폭력 가해 행위가 절대 무마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체적으로 가해지는 성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공포감 등을 줄 수 있는 언어적, 정신적 폭력까지도 포괄하는 것이 성폭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물리적인 성추행이나 강간뿐만 아니라, 불쾌한 성적 언동 및 추근거림 역시도 역시 성폭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방이 원치 않음에도 계속적으로 접근하고 관심을 표명하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스토킹도 상대방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폭력을 매개로 한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성폭력 이제 그만 2>, 2004, 반성폭력네트워크)
 
‘어지(차라)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만드는 성적인 분위기, 가해자가 뱉는 성적인 언사, 가해자에 의한 강제적 신체 접촉 및 성관계 등을 모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겪어야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저지른 그와 같은 언행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불쾌했는지에 대해 공히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 가해자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피해자와 친밀해지던 시기였다”거나 “피해자도 나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다”는 식으로 진술하며 모든 일은 피해자들과의 상호적인 교감 속에서 일어났다는 듯 성폭력 가해 의도 및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다가 피해자들의 진술을 접하고 나서야 자신의 행위가 지극히 일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비대위와 상담소는 1-(2)에 드러나는 어지(차라)의 가해 행위들을 폭력적인 경험이었다고 규정하는 피해자들의 사건 해석을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그리고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 여부는 피해자의 주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규정한 위 인용문의 내용에 따라, 어지(차라)의 가해 행위를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폭력으로 명백하게 규정합니다.
 
 
(2) 해당 성폭력의 특징 및 맥락
 
여러 사람을 상대로 가해진 어지(차라)의 성폭력은 가해 대상을 고르는 방식 및 가해 사실을 무마하는 방식 등에서 일정한 패턴을 드러냈습니다. 비대위는 가해자가 단체 내의 자기 위치 및 자칭 여성주의자로서의 활동 기간 등을 악용하여 만만하게 보이는 회원들을 물색해 가해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피해자들을 고립시켜 왔다는 사실, 게다가 반복적으로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의 심각성에 주목했습니다. 가해자의 패턴을 네 가지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해 행위의 상습성
어지(차라)는 상담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로 줄곧 상대를 바꾸어가며 다양한 상황을 통해 일방적인 성적 언사와 행동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습니다. 이같은 상습성은 가해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ㄱ) 문제의식 자체를 아예 못 가지고 있었거나, ㄴ) 문제라는 건 정확히 알지만 고칠 의지가 없었거나, ㄷ) 문제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믿었으리라는 걸 알려줍니다. 어떤 경우이든 용납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어지(차라)의 경우가 ㄱ)보다는 ㄴ)과 ㄷ)에 가까움을 보여줍니다.
 
2) 가해 이후의 사건 무마 노력
어지(차라)는 성폭력 자체로써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를 통해서도 피해자들을 괴롭혔습니다. 갑자기 제멋대로 스킨십을 저지른 뒤 당혹해하는 상대방의 모습에도 사과는 고사하고 떳떳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자신의 행위를 불쾌하게 여겨 마주치지 않으려는 피해자를 억지로 불러내어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한 방식으로 사건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마치 그런 폭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새삼스럽게 ‘동료애’를 표현한다거나, 성폭력 직후 피해자에게 연애 감정을 고백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성폭력을 무마하려는 시도를 지속했습니다. 이러한 무마 시도들은 가해자가 적어도 피해자들이 보이는 싫은 눈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본인이 달라지거나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하기보다 피해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해 행위가 성폭력으로 문제시되지 않도록 공을 들인 것이지요. 위 1)에 나열한 경우 중 ㄴ) 혹은 ㄷ)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ㄱ)의 경우라면 굳이 무마 시도를 할 까닭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성폭력 행위의 무게를 축소하고, 동료애나 로맨스로 포장해 넘기려는 시도는 1차적 가해 행위와 연속선상에 놓여 함께 성폭력을 구성합니다.
 
3) 권력 관계에 기반을 둔 행위
어지(차라)의 성폭력 행위 및 이후의 무마 시도는 모두 어지(차라)가 단체 내의 자기 위치 및 여성주의자로서의 활동 경력을 악용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가해자보다 나이가 어린 회원, 활동을 갓 시작해 상담소의 모든 걸 처음 배우기 시작한 회원, 상담소에 오기 전까지의 여성주의 운동 경험이 없거나 가해자보다 짧은 회원, 가해자보다 다른 활동가들과 덜 친한 (혹은 덜 친하다고 생각되는) 회원 등으로 모두 어지(차라)와의 관계 구도 상 취약한 위치에 놓이는 사람들입니다. 나이, 활동 경험/경력, 친분 관계/네트워크 등이 권력의 자원으로 동원되는 기존 사회의 위계적 질서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폭력적인 결과가 어지(차라)의 가해 행위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가해자는 자기보다 상담소 활동을 수년 일찍 시작한 활동가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이 사건의 피해 내용에 드러나는 종류의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가해자보다 먼저 단체 활동을 시작한 기존 활동가 중 누구도 가해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가해자가 자기 스스로 매기고 확정한 상담소 내의 서열 속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자기 위치를 가늠하여 가해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이는 가해자의 행위들이 단순한 실수도, 순수한 무지의 발로도, 순간적인 충동의 결과도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어지(차라)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으면서 들통 나지 않고 안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황을 재고 유불리를 계산한 것입니다.
 
대개 공동체/조직 내부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있어 (여느 성폭력이나 사실상 마찬가지이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배경과 사건이 덮여버리고 마는 이유는 맞닿아 있습니다. 나이나 경력처럼 통상적으로 위계 설정의 기준이 되는 요소들은 그것을 매 순간 성찰하며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활동상의 구체적인 차별과 폭력의 문제로 불거질지 모릅니다. 일단 설정되어버린 위계는 권력 관계를 매개로 한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지요. 애초부터 권력 관계 속에서 일어난 문제이기 때문에 취약한 입장인 피해자 쪽에서 문제제기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에 회원/활동가 개인보다 공동체/조직이 손쉽게 우선시 되곤 하는 집단주의적인 조직 논리가 공동체/조직 내에 은연중에건 직접적으로건, 작게건 크게건 자리 잡고 있다면 피해자로서는 자기 경험을 드러내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공통의 지향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꾸려가는 공동체/조직이라면 어떤 곳도 이 문제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조직은 첨예한 자기비판을 통해 개개인을 살피기 위한 노력을 항시 기울여야 합니다. 공동체/조직 차원에서 이같은 노력을 게을리 하는 사이 구성원 누구에게도 자기 피해를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말입니다. 이는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담소가 단체 차원에서 져야 하는 책임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바로 가해자 입장에서는 활용하기 좋은 요소입니다. 어지(차라)가 피해자들에게 입힌 피해는 성폭력 행위 그 자체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피해자들을 공동체/조직 내에서 고립시키는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까지를 아우릅니다. 어지(차라)는 활동 경험이 상대적으로 긴 활동가일수록 공동체/조직 내의 자기 위치를 더욱 민감하게 돌아보며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 전반에 걸쳐 도리어 교묘하게 그 위계를 공고히 하고 악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불편해 하는 피해자들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분 관계를 이어가고자 함으로써 피해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침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게다가 가해자는 활동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더 책임을 많이 져야 하는 일에 자원했습니다. 8월 14일 피해자 A의 신고가 있기 불과 얼마 전 가해자는 전체활동가회의 자리에서 2012년 하반기부터 2013년 초반까지의 기간 동안 상근자로 활동하기로 결의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그런 가해자를 보면서 가해자와 상담소라는 단체의 사정을 자기 자신의 입장보다 먼저 고려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극심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 가해자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까, 다른 회원들이 불편해 하지는 않을까, 모두의 활동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상담소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건 아닐까, 그러다 결국 내 태도가 지적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들에 눌려 어지(차라)로부터 입은 피해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해자의 성폭력을 가능케 하고 피해자의 고발을 어렵게 만든 권력 관계 및 조직 논리 등의 이같은 구조적인 배경은 가해자의 성폭력 행위 자체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4) 여성주의자/성소수자 인권운동 활동가로서의 자기모순적 행위
어지(차라)는 상담소 활동 속에서는 물론이고 기타 개인적인 활동의 영역에서도 여성주의자/퀴어/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자신감 있게 표방해 온 사람입니다. 상담소 활동을 비롯해 다른 여성주의 단체 및 여성이반 커뮤니티 등과 연계해 온 개인 활동 사실들을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경력 사항으로 공개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여성주의자로서의 자의식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이 또렷했던 만큼이나 어지(차라)는 상담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여성 및 레즈비언이 겪는 폭력 피해와 그 치유 과정에 대해 고민하는 작업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레즈비언간의 성폭력, 나아가 여성간의 성폭력, 더 나아가서는 동성 간 성폭력을 적절하게 언어화 하고 문제화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에 대해, 피해자를 지원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법제도적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동료들과 더불어 안타까워했습니다. 평등하게 관계 맺을 줄 몰라 상대방을 고통에 빠트리는 이반들의 이야기에 상담활동가들이 모여 분통터져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요. 어지(차라)는 상담활동가로서 동료들과 공유한 이런 문제의식들을 기초로 하여 내담자들에게 도움말을 건네는 일을 일 년 반가량의 기간 동안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곧 어지(차라)가 단체 안에서 성폭력 피해를 양산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상담소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가 내세우는 폭력 전반에 대한 입장들이나 자기가 작성하는 상담글의 전제가 되는 여성주의적 감수성 및 인권 의식 등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뒤로 줄곧 이어온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어지(차라) 활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합니다. 어지(차라)가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여성주의적 가치관과 인권감수성이 실상 허울에 불과했음을 드러냅니다. 反폭력, 反성폭력의 문제의식이란 말만이 아니라 실천까지 담보될 때에만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 역시 새삼 알려줍니다.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의 가해 행위를 스스로 문제삼거나 중단할 의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모순이 여기서 명확해집니다.
 
비대위는 사건 조사 과정에서 어지(차라)가 자신의 잘못을 일정하게 인정을 하면서도 끝내 가해 행위의 심각성을 축소하려 하는 모습을 목격해 왔습니다. 어지(차라)는 문제시된 자신의 지난 행위들에 대해 그것은 친해져가는 과정에서의 실수였다거나 교제상의 불화였을 따름이라거나 자신이 다소 미숙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며 폭력으로서의 가해 행위를 가볍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로서의 자기 책임으로부터의 발뺌이나 다름없는 이런 태도는 어지(차라)가 아직도 자신의 문제점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는 어지(차라)가 강력하게 내세워왔던 여성주의자/퀴어/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알맹이 없는 것이었음을 일련의 가해 행위와 더불어 더욱 확실하게 알려주는 요소라 하겠습니다.
 
 
 
3.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징계 사항
 
 
(1) 조치 세부 사항
 
2012년 9월 23일 전체활동가회의 참석자들은 이 사건 피해자들의 보호 및 같은 가해자에 의한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하여 가해자에 대한 조치 사항을 아래 목록과 같이 구체화 하여 최종 확정지었습니다.
 
가해자는 이하 나열된 내용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에게 지지적인 활동 공간 보장이 시급했기에 1)번 사항은 사건 접수 및 조사 개시 시점에서 가장 먼 가해자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로부터 가해자의 이행이 곧바로 시작되었습니다.
 
1) 피해자 활동 (가능) 공간에 대한 접근 금지: 피해자들의 활동 (가능) 공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써, 가해자는 상담소의 활동이 이루지는 온/오프라인 상의 모든 영역과 성소수자 인권 운동 및 여성주의 단체 등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력사항으로써 상담소 활동 경력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2) 사건에 대한 비밀 유지 요구: 가해자는 해당 사건의 내용 및 사건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활동명 포함)를 비밀 사항으로 지켜야합니다.
 
3) 사건에 대한 재규정 금지: 가해자는 이 사건의 사실 관계 및 성격을 비대위-상담소가 공개하는 해당 문건에 담긴 내용과 다르게 재규정할 수 없습니다.
 
4) 가해자 교육프로그램 이수 요구: 가해자는 해당 사건에 대한 자기반성을 촉진하고 향후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성폭력 가해자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기관을 찾아 본인이 비용을 부담하여 정성을 다해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5) 가해자 사과문 작성 요구: 가해자는 본인의 가해 행위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태도로 각각의 피해자와 상담소에 대해 별도의 사과문, 즉, 5가지의 사과문을 작성해야 합니다. 사과를 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포인트를 직접 잡아 성의를 다해 작성해야 합니다.
 
6) 사건 관련 지출 비용에 대한 가해자의 직접 부담 요구: 가해자는 피해자들이 필요로 할 시 상담 비용 등을 지원해야 하며, 사건의 조사 및 처리 과정에서 상담소가 지출한 비용을 보전해야 합니다.
 
7) 조치 및 징계 사항에 대한 이행보고서 제출 요구: 가해자들은 임시총회에서 결정한 조치 및 징계 사항에 대한 이행보고서를 매주 1회, 총 3개월 동안 상담소에 제출해야 합니다.
 
8) 가해자 사과문 및 활동명 공개: 상담소는 사건 공개와 더불어 가해자가 작성한 사과문 및 가해자의 활동명 또한 공개합니다.

9) 위 조치 및 징계 사항의 이행에 대한 가해자-한국레즈비언상담소 간 서약서 작성: 가해자는 직접 서명으로 서약합니다.
 
 
(2) 징계 사항
 
1) 준거 회칙 검토
어지(차라)는 다른 회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러 동료간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고 본인도 공유해 왔던 단체의 여성주의적 反성폭력 지향을 스스로 거스름으로써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회칙(2005년 3월 26일 8차 개정) 징계?제명 사항 규정 제12조 1호의 ‘회원 간의 불신을 조장하거나 상담소의 이미지를 실추하거나 단체의 중요한 정보를 유출하는 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상담소는 임시총회를 통해 가해자에 대한 ‘경고’를 의결할 수 있습니다. ‘제명’ 의결은 3회 이상의 ‘경고’부터 가능합니다(회칙 제13조 3호).
 
2) 전체활동가회의 (2012년 9월 23일) 논의
① 현재 회칙은 2005년도에 개정된 것으로 현재의 상담소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② 이미 상습성이 입증된 이 사건 가해자에게 ‘경고’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가해자의 가해 행위 양상에 비추어 적절하지 아니하고, ③ 무엇보다 현재 회칙은 징계의 사유로써 ‘성폭력’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아니한 바, 이 사건 가해자 징계에 있어서 회칙을 적용하여 판단하기보다는 회원들의 총의를 모아 이 사건 가해자를 ‘제명’해야 하는 필요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내 성폭력 가해자 제명의 건’을 의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3) 임시총회 소집 및 징계안 가결: 제명
총회의 의결은 출석회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회칙 제8조 제1항). 임시총회 출석인원 18명 중 18명 전원이 이 사건 가해자 제명의 건에 찬성하여, 이 사건 가해자인 정회원 ‘어지(차라)’의 제명이 결정되었습니다.
 
 
 
4.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입장
 
 
(1)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징계에 관하여
 
상담소는 피해자들과 비대위의 사건 해석 및 문제의식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서 가해자에 대한 조치 및 징계 사항들을 임시총회 출석인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우리는 가해자가 반성, 사과, 재발 방지 약속, 피해자 활동 공간 보장 등 우리의 요구 사항을 이행하기를 엄격하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이는 단체로서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하여 공동체/조직을 운영해 나가고자 기울이는 최소한도의 노력의 일환입니다.
 
우리는 어지(차라)가 저지른 성폭력들이 피해자 각각에 대한 폭력임과 동시에 상담소 정회원으로서의 약속을 저버린 무책임한 행위에 다름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상담소의 정회원이란 反성폭력 문제의식을 단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작업 및 관련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태도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 하는 회원등급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상담활동가였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합니다. 상담 활동이 활동가로 하여금 단체의 지향과 활동 윤리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도록 하는 자극 그 자체라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러한 환경에서 내내 활동해 왔으면서도 反성폭력 문제의식을 전혀 몸에 익히지 못했다는 건 활동가 어지(차라)의 무성의, 노력 부족, 성찰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상담소는 가해자가 3.에 명시된 조치들을 성실하게 이행해 나가면서 뒤늦게나마 자기 자신의 가해 행위들을 철저하게 문제로 인식하고 反성폭력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타인들과 상호작용 하는 훈련을 해나가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징계 결정/통보 및 사건 공개가 이번 성폭력 사건 해결의 최종 지점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일은 다시금 反성폭력 운동을 재구성해 나가는 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상담소는 피해자들이 상담소 내에서 보다 안정감을 가지고 활동해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가해자가 이번 일을 계기로 변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후 관리의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또한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 성폭력을 언어화/가시화 하고 그 특수성에 걸맞은 예방책과 사후 대책을 마련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고자 합니다.
 
 
(2)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에 관하여
 
상담소는 피해자들의 활동을 상담소라는 공간을 넘어 전체 성소수자 운동 진영 및 여성주의 운동 진영 등까지 넓혀 보장하고 그에 대한 타 단체 및 개인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당부하고자, 해당 성폭력 사건 및 가해자의 활동명을 공개합니다.
 
첫째,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는 피해자들이 상담소 활동을 통해서든 개인적으로든 접촉할 기회가 많고 직접 흥미를 느껴 탐색을 원하는 운동 영역들 안에서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하게 원하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모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가해자는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나중에라도 일 때문에 갈 수 있는 거 아니냐”라든가 “퀴어퍼레이드도 운동진영이냐”는 등의 질문으로 자기가 여성주의 및 성소수자 운동진영에서 언제든 다른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의사가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가해자가 실제로 그렇게 활동을 재개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의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해자들의 활동반경이 현저히 축소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건과 함께 활동명까지 공개함으로써 가해자가 해당 운동 진영들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폭을 가능한 만큼 좁히고자 합니다.
 
둘째,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는 가해자가 충분한 반성과 자숙 없이 성소수자 운동 진영 및 여성주의 운동 진영 등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일과, 가해자로 지목되어 제명당한 단체에서의 활동 경험을 다른 단체 접촉, 진입 시 경력으로 제시하며 자신에 대한 이점으로 삼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2-(4)의 내용에 이미 드러나 있듯 가해자는 평소 자기가 성소수자 운동 진영 및 여성주의 운동 진영에서 했던 활동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경력’삼곤 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최소한 가해자가 그간 관심을 두어 온 운동 진영들에 대해서만 이라도 가해자의 상습적 성폭력 가해 사실 및 그로 인한 상담소로부터의 제명 및 기타 조치에 대한 인지를 확실히 해 주시기를 당부해 두어야 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문서를 접하시는 분들께서는 향후 가해자와 관계가 형성될 경우 그와 같은 인지를 토대로 해서 가해자를 동료로 받아들이실 지의 여부를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가해자는 여성주의자로서, 성소수자 인권운동 활동가로서 본인이 내걸었던 가치와 지향을 본인이 직접 자기 행동으로 파괴한 사람이므로 이번 일로 본인을 향하게 될 운동 진영의 불신 역시 직접 감당하고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셋째, 사건과 더불어 가해자의 활동명을 공개함으로써 우리는 레즈비언 간 성폭력이 엄연히 가해자가 존재하는 실제적인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보다 또렷이 알려내고자 합니다. 피해가 있으면 가해가 반드시 있는 법이라는 점, 성폭력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는 결코 남자-여자 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 여기에 구체적인 사람, 한 명의 여자, 한 명의 레즈비언으로서의 가해자가 이렇게 이름을 지닌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이는 동성 간 성폭력, 특히 여성 간 성폭력, 그 가운데에서도 레즈비언 간 성폭력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고 과소화 혹은 무화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목표설정입니다.
 
사건과 가해자 활동명을 공개하기로 한 결정은 가해자의 절대적 격리나 영원한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상담소는 해당 사건 내용 및 가해자의 존재를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림으로써, 사건 내용을 공유하게 될 모두에게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의 성폭력, 여성간 성폭력, 그리고 동성간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과 책임감을 더 널리 나누어 짊어지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가해 행위의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습니다. 상담소가 가해자를 징계하는 것도 해당 성폭력 사건에 대한 가해자의 책임을 단단히 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성폭력을 오로지 자기모순적인 가해자 개인의 잘못으로만 간주하고 넘겨버리는 태도는 성폭력 없는 레즈비언 커뮤니티, 나아가 성폭력 없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담소는 레즈비언 간 성폭력에 대한 적지 않은 내담 사례 및 사건 신고를 접해 오면서 피해가 발생하고 그 사실이 무마되고 유사한 사태가 재생산되는 모든 과정이 동성애자의 사회적 취약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비하와 낙인이 지배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레즈비언 당사자에게 이반 커뮤니티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커뮤니티 바깥에 사회적 지지기반을 상대적으로 덜 확보하고 있는 레즈비언일수록 그 특별함과 소중함의 정도가 더 크기 쉽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성폭력이 발생해도 커뮤니티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나 같은 이반으로서 가해자의 사정을 살피게 되는 마음이 피해자를 제약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조용히 덮고 넘어가기를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커뮤니티 바깥의 제3자에게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고 그 맥락을 설명하는 작업이란 레즈비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기에 피해 시점에서 아직 커밍아웃을 할 실질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피해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애초에 동성애자가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피해를 언어화 하는 일이 이토록 난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은 또한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 한 남성성기중심적 성폭력 규정에 일부러 더 의지하려 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겪은 성폭력의 무게를 그것이 여성 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이유로 자기가 실제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무관하게 과소화 하는 것입니다.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같은 안타까운 상황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편안하게 속하여 행복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 애초에 성폭력 없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과 사회 전반적인 동성애자 인권 지수 향상을 위한 노력이 나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어떠한 가해자 개인에게 떠넘길 수 있는 종류의 책임이 아닙니다. 커뮤니티와 운동 진영이 같이 움직이며 전략을 짜나가야 하는 일인 것이지요.
 
비대위는 가해자를 면담하며 어떤 이유에 의해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가 필요한지에 관하여 거듭 설명을 했으며, 가해자 또한 그 점에 동의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띄워 올린 피해자들의 귀중한 용기에 정당하게 의미부여 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반 커뮤니티, 성소수자 커뮤니티, 여성주의 및 성소수자 운동 진영 등에서의 反성폭력적 문화 확산에 대해 보다 많은 분들이 더욱 다양한 의견들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 모임, 공동체, 조직을 돌아보며 상담소와 같이 이 문제에 천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사건 및 가해자 활동명 공개를 결정하기까지의 고민들
 
‘레즈비언 간 성폭력’이라는 해당 사건의 특수성으로 인해, 사건 및 가해자 공개 여부 그리고 그 범위와 방식을 고민하는 전 과정은 딜레마와의 지난한 싸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피해와 피해자의 존재가 무화되는 사태를 막고 실체로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보다 넓은 가시화가 필요하다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성폭력 가해자라고 하면 단순히 ‘괴물’로 환원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고 레즈비언을 무성적이거나 과잉성애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양편향이 심각한 시공간입니다. 하기에 우리는 사건의 가시화가 동성애/자에 대한 기존 편견을 강화하는 원치 않는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는 염려와 스스로 대결해야 했습니다. 사건 및 가해자 공개라는 결정과 그 이행이란 피해자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 가해자의 레즈비언 정체성 자체에 대한 최대한의 보호, 그리고 레즈비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과의 싸움, 이 세 가지 모두를 최선을 다해 한꺼번에 짊어지겠다는 결의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결의에 따라 우리는 먼저 성폭력이라고 하면 으레 남성 성기가 여성 성기 안에 강제로 삽입되는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여전히 지배적인 통념에 맞서 레즈비언 간 성폭력의 존재를 밝히고 문제삼습니다.
 
남성성기중심적인 성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란 한편으로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욕적이거나 무성적인 존재로, 다른 한편으로는 (금기를 넘는 욕망을 실현한다는 이유로) 과잉성애적인 존재로 축소, 과장, 환원, 왜곡되어 왔습니다. 또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관계 맺기의 양상들과 개개인이 지닌 성적인 경험들은 훨씬 더 다채로움에도 여전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성관계 모델로 여겨지는 것은 이성(부부)간에 치르는 섹스입니다. 이렇게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성문화와 이성애 규범을 토대로 한 성관계 모델이 위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성폭력도 마찬가지로 이성간에 벌어지는 일로만 상상돼 왔습니다.
 
우리는 성관계나 성폭력을 이처럼 남성의 성욕과 성기에만 근거해서 인지하는 통념에 반대합니다. 성관계나 성폭력을 성기중심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도 반대합니다. 여성을 무성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에도 반대하지만 모든 사람을 당연히 성적인 존재로 전제하는 시각에도 반대합니다. 레즈비언을 문란한 존재로 보며 비하하는 시각에는 반대하지만 레즈비언이 저마다 마음껏 문란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 성적인 것, 성관계 등에는 정상적인 모델이라는 게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 형태가 독점적으로 우위를 차지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폭력을 성을 매개로 한 모든 폭력으로 규정합니다. 성별정체성, 성별표현,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무관하게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피해의 종류와 경중을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형태로건 어떤 정도로건 누구에 의해서건 성폭력이 일어났고 피해자가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동성 간 성폭력 가해자-피해자 성/성별정체성 조합의 가짓수 역시 다양합니다. 일례로, 군대내 동성 간 성폭력은 조직 내 철저한 상명하복 위계관계를 매개로 남성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입니다. 다른 예로,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커밍아웃을 하자 이성애자인 동성 친구가 악의적으로 진한 스킨십을 시도해 곤혹을 치렀다는 경험담이 공유되곤 합니다. 동성 간 성폭력은 수많은 개인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여러 다른 조합으로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보다 평화 지향적이라거나 여성은 남자만큼 성욕이 없다는 등의 여성성에 대한 부당한 가정은 동성 간 이성간을 막론하고 성폭력의 여성 가해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성 가해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남성은 피해를 제대로 인정받고 구제받기는커녕 본인의 남성성이 웃음거리 취급받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여성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은 도대체 여자끼리 뭐가 되기에 성폭력 운운하느냐는 반응을 접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레즈비언을 그 자체로 타락한 존재 취급하는 낙인의 시선이 레즈비언 간에 일어난 성폭력을 문제삼는 데에 걸림돌이 됩니다. 이같은 시선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공히 ‘변태’로 봐 버리기 때문에 폭력의 가해와 피해 문제를 다룰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여성성에 대한 이같은 부당한 전제 그리고 여성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에 맞서 단체의 성폭력 사건을 공개합니다. 피해를 호소해 온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지목된 가해자가 있습니다. 레즈비언 간 성폭력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레즈비언이 ‘변태’라는 증거가 아니라 성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방증입니다.
 
레즈비언 간의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나아가 동성애자 간의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작업과 동성 간 성폭력을 동성애자의 병리 현상으로 환원하는 방식에 균열을 내는 작업은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함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레즈비언 간 성폭력, 나아가 동성애자 간 성폭력이 제대로 인지가 안 되는 까닭과 동성 간 성폭력이 동성애자의 ‘변태 행각’으로 환원되는 까닭은 그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성관계와 성폭력을 각각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 욕망의 실현과 남성 욕망의 왜곡으로 의미화하는 남성성기중심적 이성애구도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 가해를 모두 규범화, 정상화합니다. 이같은 인식틀은 그 밖의 욕망과 폭력을 인지하고 가시화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동성 간 성폭력과 동성애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똑같이 비정상, 탈규범, ‘변태 행각’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동성 간 성폭력과 동성애가 다른 말 같은 뜻이라는 부당한 가정을 끊어내는 일은 이처럼 공고한 남성성기중심적 이성애주의에 기반한 성관계, 성폭력 규범을 거스르는 작업입니다. 동성애를 병리화하지 않으면서 동성애자 간 성폭력을 문제삼을 수 있게 해주는 작업입니다. 이는 동성애자간 성폭력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다른 동성 간 성폭력의 동성애자 피해자, 비동성애자 피해자 모두를 돕는 일입니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성폭력 피해자를 탓하는 우리 사회의 행태는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고 가해자들을 자유롭게 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성 간 성폭력과 동성애를 도매금으로 낙인찍는 행태는 동성 간 성폭력의 피해자를 성정체성 막론하고 같은 방식으로 침묵시킬 수 있고 그래 왔습니다. 우리는 레즈비언 간 성폭력 피해자가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드러내고 지지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로 인한 고통보다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대한 공포가 더 커 외롭게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상황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성 간 성폭력의 피해자가 성정체성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동성애 혐의와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피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낙인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은 가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해자의 잘못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데에 있지 가해자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성폭력을 일으킨 사태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혐오세력의 타깃이 되어도 좋은 건 결코 아닙니다. 상담소는 가해자를 실명이 공개됐을 경우 자신의 잘못과 무관하게 겪게 될지 모를 여러 위험들에 노출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성정체성을 매개로 한 모든 차별을 민감하게 방지해야 하는 상담소에서 절대로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라고 봤습니다. 이것이 레즈비언 간 성폭력 사건의 가시화 및 운동 진영에서의 피해자 활동 보장을 위해 단체 안팎으로 가해자를 공개하되 그 범위를 실명 공개가 아닌 활동명 공개로 한정짓기로 결정한 배경입니다. 커뮤니티 및 운동 진영이라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는 활동명이 실명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만큼 가해자의 활동명 공개가 피해자들의 활동 반경에서 가해자를 실제 인물로 가시화 하는 데에 충분히 기여하리라고 기대합니다.
 
 
(4) 단체의 약속
 
상담소는 가해자가 서면 서약으로 약속한 사항들을 두루 잘 이행하는지의 여부를 지속적으로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이는 사건 피해자들이 지지적인 환경에서 활동을 지속하도록 상담소가 기울일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보다 앞으로 상담소 내의 反성폭력 문화 확산 및 정착을 위해 실질적인 움직임을 마련하겠습니다. 회원 단체에서 성폭력 가해자가 나왔다는 것은 단체가 평상시 내부적으로 反성폭력 감수성을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 느슨했다는 사실의 뼈아픈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밖에 만들지 못해왔다는 점과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사태를 더욱 면밀히 파악하여 서둘러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모두 단체의 책임입니다. 두 갈래 책임 모두를 이제부터 더욱 성실하게 지겠습니다.
 
첫째, 성폭력 사건 예방에 우선 주력하겠습니다. 신입회원 세미나뿐만 아니라 기타 다양한 회원 프로그램들을 잘 활용해 한 명 한 명이 보다 철저히 그리고 섬세하게 反성폭력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反성폭력적 관계 맺기를 실천하는 데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원 간에 어떤 형태의 위계도 두지 않는 수평적 소통 구조를 지향하는 상담소의 기본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작고 큰 권력 관계에 대한 일상적인 성찰이 회원들 모두의 몸에 자연히 배어들도록 애쓸 것입니다.
 
둘째, 성폭력 사건 발생 시 더욱 효과적으로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사건 대응 능력을 키워나가겠습니다. 이번 성폭력 사건을 통해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 성폭력에 대한 관점 자체를 보다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건을 접한 비대위 구성원들과 상담소 회원들은 이같은 성폭력 사건을 공동체 안에서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논의하는 것이 옳은지 갈피를 잡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입니다. 당혹스럽고 어려운 느낌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가해자 제명과 사건 공개가 끝일 수 없는 건 우리의 구체적인 고민이 이제야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예방 및 근절을 위한 反성폭력 규약 역시 성문화하려고 합니다. 상담소는 사례집 격인 <성폭력 이제 그만 1, 2> 매뉴얼 외에 따로 反성폭력 규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탓에 이번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여러 단계에서 대학 여성 운동 단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학내 反성폭력 자치규약 및 타 단체들의 성폭력 관련 규약들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유사 사건 재발 시 보다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규약을 만들겠습니다. 성폭력 피해 신고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전한 통로, 피해자 중심의 사건 처리를 위한 절차적 방안, 사건 발생 시 그 해결에 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바람직한 자세 등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논의하여 그 결과를 규약에 반영하겠습니다. 성문화 방식은 경우에 따라 독자적인 내규 제정이 될 수도 있고 현행 회칙에 관련 조항들을 첨부하는 회칙 재개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되는 대로 여러분들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상담소 운영의 근거가 되는 회칙을 이제까지보다 더 공들여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운영 방침이 회칙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살피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칙의 내용이 실제 운영의 필요성을 반영하지 못하여 다만 우리의 족쇄로만 작동하는 건 아닌지를 점검하여 그 결과에 따라 운영 방침을 조정하거나 회칙을 수정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2005년 최종 개정된 회칙은 성폭력 사건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둔 버전이 아닐 뿐더러 2012년 현재 상담소의 운영 모습과는 맞지 않는 조항들을 담고 있어, 이번 사건 해결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한 징계 내용 및 절차를 결정하는 데에 근거로 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만 먼지를 털고 들여다보는 낯선 문건이 아닌 실제 상담소의 운영과 맞물려 제 기능을 다 하는 친근한 조항들로서의 회칙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용기와 결단으로 이렇게 사건 공개를 통한 공론화에 이르렀습니다. 그 용기와 결단이 계속해서 빛날 수 있도록 상담소는 약속드린 바들을 하나씩 정성껏 실행해 나갈 것입니다. 이 사건을 함께 겪었고 같이 기억해 나갈 상담소 회원 분들의 꾸준한 고민과 참여,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의 조언, 격려, 그리고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2012년 11월 1일
한국레즈비언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