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벽장문이 활짝 열리는 날을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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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6년 11월 21일
_ 꼬마 HJ

[내 말 좀 들어봐] 벽장문이 활짝 열리는 날을 기다려요
-한 동성애자 동무의 솔직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18살 고등학생 레즈비언(*)입니다. 아, 사실 이건 비밀이에요. 학교에서 제 친구들은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거의 하나도 모르거든요. 제 친구들은 그냥 제가 남자에 별 관심이 없고 주위의 여자 친구들을 매우 예뻐라 하는, 조금 특이한 아이로만 알아요. 제가 이성애자 흉내를 썩 잘 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숨기려고 신경 써서 노력을 하거든요. 친구들이 남자 얘기를 할 때면 맞장구를 친다던가, 학교에서 좋아하는(척 하는;;) 남자 선생님을 만든다던가 하면서 말이에요. 열심히 맞장구는 쳐주지만,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전! 항상 불편해요. 관심도 없는 남자 얘기를 꾹 참고 듣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거든요.

‘이화여자대학교 레즈비언 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에서 주최한 레즈비언 문화제 홍보 포스터 가끔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동성애자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아요. “우웩~!” 인상을 찌푸리고 다른 얘기를 하자며 화제를 돌리는 친구의 반응은 그나마 나아요. 더럽다느니,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느니, 그런 사람들은 다 병에 걸릴 것이라느니 하는 끔찍한 말들을 퍼부어대요. 저는 그럴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지곤 해요. 친구들은 제가 바로 그 동성애자라는 걸 알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짓곤 하는, 벌레 보듯 하는 표정을 지을까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는 친구들이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친구들이 한 순간에 모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슬퍼져요.

그래서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야지! 하고 꼭꼭 다짐을 하는데, 그래도 가까운 친구에게 이해를 받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나 봐요. 최근에는 가깝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 친구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 제가 가끔씩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저한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변태’라고 할 때도 있어요. 저도 제 자신이 변태가 아니란 걸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 친구는 어떨까…하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 친구의 진심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씁쓸해 한 적이 많아요.

이제는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아직도 벽장 안에 갇혀 있는 게 너무너무 답답할 때가 있어요. 벽장 안은 너무 어둡고 좁고 불편하거든요. 가끔씩 문을 살~짝 열어보려 하다가도 왠지 무서운 마음에 얼른 닫아버리곤 해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몰라요. 레즈비언들은 더럽고 끔찍한 변태가 아니라는 걸, 저처럼 그냥 평범한 열여덟 살 여고생일 수도 있다는 걸요. 모르면 앞으로라도 알아 가면 될텐데, 사람들은 도무지 알려고 하지를 않네요. 그래도 이 세상의 모든 벽장문들이 화알짝 열리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어서,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 레즈비언 : 여성 동성애자를 부르는 말.
(**) 커밍아웃 : ‘coming out of closet’이란 말을 줄여서 쓰는 건데요.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 때문에 벽장 속에 숨어있던 동성애자들이 당당하게 나온다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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