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집에 들어오는 길, 골목 어귀, 군밤과 군고구마를 파는 할아버지, 밤 9시쯤? 지나는 사람은 없고 할아버지는 리어카보다 훨씬 작은 고구마와 밤을 굽는 가판에서 조금 떨어져 하늘을 보고 있다. 지나간다. 군밤 2000원. 뒤돌아본다. 앞을 봤다가 다시 돌아본다. 돌아가서 군밤 한 봉지를 산다. 따끈하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나의 행동… 부끄럽다.

회사를 관두고 나서 먹고 살 길이, 생각보다는 덜 고단하게 풀리지 않을까 싶은 일이 있었다. 두렵다. 낙관도 두렵다. 세상이 험악한 것은 세상이 그만큼 험악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을 떠올리며, 적어도 낙관을 두려워하지는 말자고 다독여본다.

나는 오랫동안, 현실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는 친구들이 전공과 상관 없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아니, 그보다도 직장을 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뚜렷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뭔가를 뭐라고 하더라? 좋은 단어가 분명히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조, 견해, 뭐 이런 뜻이었는데, 주관, 주관인가 보다.) 뚜렷한 주관도 없으면서 뚜렷한 전망도 없는 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전망이 불분명한 학과를 그것도 대학교 전공도 아닌 과를 들어갈 때는 적어도 주관이라도 뚜렷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마치 길에서 좋은 냄새를 맡고 그 냄새를 쫓아가듯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그런 식으로 들어갔다. 그래, 나는 운이 좋았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적어도 가고자 하는 과로 들어갔으니까. 하향지원이니 어쩌니 해도 점수를 보고 과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너무 오만한 나머지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돈을 버는 일이 나에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다. 눈치도 채지 못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지만 이 결정이 중요한 결정이라는 사실은 안다. 내 나이가 적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인지도 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일을 계속해서 안정된 정신상태로 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되어서, 물이 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둑이 터져버리는 인간이어서, 끊임 없이 입을 비죽대고 불평하느니 죽으나 사나 내 탓이라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흐르지만,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봄과 여름을 바쳐 죽도록 만든 책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인세를 꽤나 받았는지 편집부에 돈을 들고 왔다. 그 책을 만든 인원은 네 명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나와 또 다른 한 명이 불공평하게 많은 돈을 받았다. 나는 그 결정 과정에 낄 군번(?)이 못 되기 때문에 돈을 받으면서 액수가 다르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다. 내 생각에는 뭔가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할만한 해법이 있을 듯한데, 내게 돈을 전해 준 또 한 사람, 불공평하게 많은 액수를 받은 나의 팀장은 묘하게 수동적인 사람이라 자기자신 역시 결정에는 끼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받으라고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묘하게 수동적인 이 사람… 묘한 데서 늘 결정적으로 수동적이다. 잔소리 없고 찍어 누르지 않아서 좋아했는데 그런 것도 무작정 좋아할 특징은 아니었다. 잔소리 없고 찍어 누르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팀원의 바람막이 같은 것은 정말 할 생각조차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혼신을 바칠 곳을 찾지 못하면 타락하게 된다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다. 도덕적인 타락도 물질적인 타락도 아니다. 혼신을 바치지 못하는 삶 자체가 타락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에 대한 불안, 불확신, 그로 인한 이 타락을 이 여자 하나만 탓해야 하는 걸까? 여기까지 가면 생각이 너무 복잡해진다. 일단 접고.

이 불공정한 배분은 한 마디로 회사를 떠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주는 미끼이다. 입사 이후 처음 생긴 가욋돈이지만 회사에서 주는 성과금도 아니고 저자가 고맙다고 들고 온 돈은 사실 미끼 자격도 없다. 아, 미끼는 또 있다. 다음 달부터 우리는 어느 계열사에도 주지 않는 야근 수당을 정액으로 받기로 되어있다. 몇 십 만원 더 받는다고 광기가 다스려질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지. 나는 우아하게 ‘남들 안 주는 야근수당’ 받기 전에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정말 우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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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1

댓글 1개

허무한 상념님의 코멘트

허무한 상념
뽀님 다니는 직장 좋은 직장 같아요. 사람들하고 별로 문제도 없는 것 같고. 월급도 밀리지도 않고. 게다가 야근수당, 또 보너스 처럼 오는 ... 남이 말린다고 그만둘 사람이 그냥있지는 않겠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 생각하고 이 악물고 돈 벌어서 나중에 하고 싶은 일 하시면 어떨까용? 노파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