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도 혼란스러웠던 걸까?

만화책을 강철같이 씹어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만화책이 아니라서 실망스럽지만ㅠㅠ 일단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읽는다.

어제 밤에는 눈이 많이 왔다. 지하철 역에 내렸을 때 조금 살살 뿌리는 듯 하더니 마트에 서 별로 산 것도 없이 망설이느라고 한 30분쯤 있다가 나오니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트 앞에서 마을 버스 정류장까지 100미터쯤 걷는데 벌써 옷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한참 만에 온 마을 버스는 결국 집에 가까운 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면서 큰 길에 내려줬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

지금도 눈이 온다. 아직 올 눈이 남았나 보다. 어젯밤에 들어올 때는 오늘도 회사에 가려고 했는데 눈이 이렇게 온 걸 보니 나가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흠…

낮에 ‘28세’에게서 전화가 왔다. 28세… 다섯 살 더하면 33이니까 내가 서른 세 살에 소개팅한 남자다. 서른 세 살에 나는 결혼해서 내 가족, 내 아이, 내 집, 내 차, 시집식구, 뭐 이런 것들을 ‘갖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다섯 살이나 어린 것과 소개팅도 했는데… 결과는 한 번 만나고 끝이었다. 28세의 취미생활이 반년에 한 번, 일년에 한 번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 것이라고 하길래 오늘 같은 일에 대비해서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오래 참았다. 여름 쯤에 만났으니까 족히 1년 반은 지난 것 같다. 나한테는 전화하지 않을 모양이지? 하고 있었는데… ㅋㅋ 실은 그 해에 만난 세 남자의 전화번호는 다 갖고 있다.

28세의 전화는 받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포르노로 가득 차 있는데, 아무래도 내 마음과 몸은 아닌가…? 그럴 리가… 어쨌든 28세의 전화는 받지 않았다. 당장 섹스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상대인데 왜? 내 말이… 왜?

몸과 머리가 포르노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마음과 몸은 의미 있는 관계를 원한다는 건가? 미래를 바라볼 수 없거나 꼭 미래가 아니라 하더라도 잠시라도 가족이라는 느낌을 얻을 수 없다면 섹스가 안 된다는 건가? 아, 정말 나는 뭘까…? 맥 빠진다.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여자가 있었다. 나를 좋아한 건 맞는 것 같다. 이성애 혼인을 지독하게 원하면서 나를 좋아했다는 게. 그 여자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나를 좋아한 게 맞다. 하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늘 이성애 혼인을 지독하게 원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었다. ‘그래, 너는 태어나길 게이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현재 시점에서 네가 원하는 건 이성애 혼인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굳이 내가 딴지 걸어주지 않겠어.’ ‘난 전도사 되기 싫어.’ ‘굳이 이성애자로 살려는 한 여자를 동성애자의 삶에 동참해달라고 유혹할 마음 같은 거 없어.’

지금의 나처럼 그 여자도 혼란스러웠던 걸까? 우리는 싸웠다. 나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내는 그 여자가 미웠다. 말로는 이성애 혼인을 원하지만 남자가 만나자고 하면 언제나 만나러 나갈 힘이 없고, 그리고 나에게는 늘 잘 해주었지만 묘하게 요구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신호가 싫었다. 입만 열만 나오는 남자 타령이 싫었다. 우리는 싸웠고 화해는 흐지부지 되었고 나중에 그녀는 다른 부서로 옮겨갔다.

그 여자는 회사에 적을 만들지 말자는 주의였는데 그런 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격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뒷담화로. 그런데 굳이 그렇게 화를 낼만한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갸우뚱했다. 평소 그녀가 보여주던 자세와는 너무 달라서. 또 욕을 먹은 인사가 그녀에게 어떤 직접적인 잘못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 욕을 먹은 사람이 서운하게 대한 것은 나였다. 그것도 뭐 그닥 큰 잘못도 아니었고. 잠시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실 내가 먼저 잘못한 것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사소한 일이었다.

뒤돌아서 맞춰보면 이렇게 모든 것이 마치 드라마 찍듯이, 유치한 연애소설처럼, 직소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그 여자는 정말 나를 좋아했던 걸까?

나는 그 여자에게 컴아웃해야 할까? 이 모든 시간이 흐른 지금에…

어쨌든 그녀를 한 번 만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작금의 상황은 좀 더 드라마같이 되어버려서 그녀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애는 써봐야겠다. 한 번 만나기는 해봐얄 것 같다.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