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8월 14일 밤
1.        100원 동전 한 개
2.        물집에 붙이는 테이프 한 조각
3.        등산용 스카프 2장
4.        핸드폰 대용량 배터리
5.        섬진강 도보 참가자 명단
6.        참가 등록 카드-이건 왜 안 내고 여태 갖고 있나?
7.        등산용 숟가락

작년 4월에 섬진강 도보를 다녀왔다. 그때 배낭을 이제 풀었다. 전체 배낭을 이제 풀었다는 건 아니고, 도보를 다녀와서 옷가지 따위를 뺄 때 배낭을 완전히 비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 6월 이사한 반지하 방에서 하도 곰팡이 냄새가 나서 잠을 못 잘 정도라, 주워들은 대로 소주를 분무기에 넣고 뿌려가며 곰팡이 슬은 배낭을 닦다보니 이것저것이 들어 있었다.

핸드폰 대용량 배터리는 이사할 때도 안 나오길래 어디 완전히 잃어버렸군 했더니 배낭에 곱게 들어있었다. 등산용 스카프 두 장은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안 보이는 것이 생각나서 또 어디다 갖다 잃어버린 모양이군, 아니면 어디 곱게 쳐박혀 있을까나 했던 것들인데 두 개가 같이 얌전히 나왔다. 쓰지도 않은 채로. 어쨌든 가방 속에 오래 묵었던 것들이라 빨려고 빨래감통에 던져 넣었다. 섬진강 도보 참가자 명단을 보니 온갖 감회가 다 밀려왔다. 그게 없었다면 그저 오래된 배낭을 푼 것뿐일 텐데, 그런 구체적인 증거가 있으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이 다 떠올랐다.

일년 하고도 넉달이 지났을 뿐이라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메롱과 헤어진지도 일년 하고 넉달이란 소리다. 오년이 너무하다면 최소 삼년은 된 것 같다.

나는 요즘 실종된 나의 감정을 찾는 일을 계속 생각한다.

실종된 감정, 또는 땅 속 깊이 파고들어 숨어버린 감정을 찾은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그저 찾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자꾸 생각하다 보면 찾아지겠지. 삶은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알게 모르게 나를 데리고 왔다. 언제나 그랬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난 아마 내 감정도 찾게 될 거야. 기다린다. 내 감정이 숨어버린 걸 아는데 삼십 몇 년이 걸렸다. 그 동안은 감정이 없는데도 있는 줄 착각하고 살았다. 조금 기다리는 것쯤, 일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을 잘 느낄 수가 없다. 긍정적인 감정은 과장되고 부정적인 감정은 부인된다. 어느 쪽이든 왜곡이 심하다. 게다가 사랑에 관한 감정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에 관한 감정은 정말 잘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모두 집착, 사귀면 이래야해, 애인은 저래야해, 뭐 이런 식의 집착이나 고집, 오해였다는… 새삼스레 반성하는 게 아니라, 반성은 이미 했고, 나 자신을 좀 알고 싶다. 나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우습게도 나는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다. 나는 문학으로 평생 단련되었고 남의 일을 내 일같이 느낀다. 남의 일을 내 일같이, 그리고 내 일은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운다. 내 아버지의 심정이 되어서 운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는 울지 못한다. 슬픔도 느낄 수가 없다. 어느 감정도 나의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나의 감정을 느끼는 일은 안전하지 못하다. 나는 연민을 느낀다. 남이 된다. 쉽게 아주 쉽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내가 아끼는 사람이 되고, 약한 자고 되고, 가난한 자가 된다. 하지만 나 자신은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이 되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라고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내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았다. 그래서 나 자신으로 산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주 짧은 환희의 순간을 빼고는.

처음 지리산 능선에 올라서 먼 산 능선을 바라보며 야호를 외쳤던 때라거나, 극단적인 체력의 한계 속에서 바라본 산의 압도적인 풍경(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갑자기 펼쳐지는 꽃밭, 뛰어내리면 받아줄 것 같은 한여름 폭염 속에 우거진 계곡, 바라보기만 해도 좌절감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오르막길, 뭐 이런 식으로 나의 황홀경은 주로 산, 나무숲, 산길에서 잠깐잠깐 스쳐 지나갔다.

다시 읽어보니 굉장히 피학적이구만.

하긴 며칠 전에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나야말로 메저키스트라는 생각도 했다.

얼마 전 티비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의 인터뷰를 봤다. 자신의 발 사진을 얘기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발레는 메저키스트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고통 속에서 정신일도를 경험하는 사람들…

뭐가 됐든, 메저키스트가 됐든 사디스트가 됐든, 나는 나를 느끼고 싶다. 내 감정을 느끼고 싶다. 내가 뭘 느끼는지 말하고 싶다. 모든 감정이 머리통을 걸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안전하지 못한 대부분을 버려버리고 뭔가 유쾌하다 싶은 것들만 병적으로 과장하고 뻥튀기고 부풀리고 풍선처럼 불어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 그대로, 느끼고 싶다. 나 자신이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여태까지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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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3

댓글 3개

soul님의 코멘트

soul
한동안 조용하셔서 많이 궁금했더랬어요...잘 견디시길...

soul님의 코멘트

soul
섬진강은 내 오랜 동경.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성격탓에 섬진강 도보여행은 몇 년째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네요..

뽀님의 코멘트

님, 저도 혼자 간 것은 아니었어요. 다음 까페에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이라는 (줄여서 인도행) 까페가 있는데 거기서 갈 때 같이 갔지요. ㅎㅎ 아주 자율적이고 돈관리면에서 깨끗한 까페에요. 이반 까페는 아니구요. 남녀노소, 가족, 친구들, 혼자 오는 사람들, 기타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참여하는 모임이라 저는 아주 좋더라구요. ^^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요즘 이런 까페 많은 것 같더라구요. 까페 활동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