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자처럼 먹고 이성애자처럼 걷는다

2006-08-15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열대야를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읽으면서 버티고 있다. 역시 명작은 여러 번 읽어줘야 해. ㅎㅎㅎㅎ 몇 년 전에 서양골동양과자점을 읽고서 후미 요시나가에게 푹 빠졌다. 푹 빠진 것이 다시 몇 년 후, 작년에 메롱과 한 판 싸우고 나서 화난 김에 돈 쓰려고 나가서 단편집을 여러 권 산 정도다. (아, 김 빠져~!) 막상 서양골동양과자점은 읽었기 때문에 사지 않았는데 요 며칠 전서부터 다시 읽고 싶은 맘이 간절해져서 확~ 질러버렸다. 며칠 전부터 왠지 극장에서 볼 때는 별 재미를 몰랐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보고 싶고 그렇다. 하울은 동네 디비디 대여점에 열댓 개는 있는 모양인데 하나도 남은 게 없어서 아직 못 보고 있다. 요즘 다시 일이 ‘죽게’ 바빠져서 당분간은 못 볼 것 같다. 일 끝나고 보든지.

서양골동양과자점을 보고 있으면 ‘호모’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없어진다. ㅋㅋ 일본에서는 2000년에서 2002년 사이에 1권부터 4권까지 출판된 것 같은데 그렇담 연재는 그 몇 년 전부터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튼 이 만화에서는 ‘호모’라는 말이 몹시 존경하는 사부를 정의하는 용어로 쓰인다. 게이 파티셰인 오노 유우스케에게 양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는 제자 칸다 에이지가 멀쩡한 얼굴로 우리 사부는 호모야, 라고 말한다. 하하하!

‘오바이트 하기 전에 얼른 콱 뒈져버려, 이 호모야!’라는 다소 충격적인 대사도 나오긴 하지만 그 외에는 호모라는 단어가 대략 중립적이거나 무신경한 채로 쓰인다. 그 무신경함은 만화에 나오는 다른 인물, 코바야카와 치카게가 느무 눈치 없고 무신경한 나머지 어릴 때 한 달간 유괴당했던 타치바나 케이이치로를 아무 생각, 계산, 의도 없이 돌봐 줄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기차 길 옆에 살다가 기차 사고로 팔을 잘린 아이를 ‘팔자 병자 신자’(적합하지 않은 단어라 등록이 안 된대서 띄어쓰기함다. 이것도 가식이라고 봐. 가식을 강요하지 말라구!)이라고 계속 불러줬던 영화가 …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뭐, 그거랑 비슷한 분위기다.

쓰다보니 뭔가 힌트를 주었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걸…?

돈 많은 집 손자인 케이이치로는 아홉 살에 유괴를 당한다. 경찰은 몸값을 노린 유괴에 초점을 맞추어 수사하지만 실은 아들을 잃은 남자의 짓이었다. 몸값 요구는 없었고 케이이치로는 한 달 만에 유괴범을 찌르고 도망치지만 그 남자가 매일 케익을 줬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머리 좋고 재주 많고 얼굴 잘 생긴 (누가 만화 주인공 아니랄까봐!) 소년은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며 살게 된다. 화장실 가서 몰래 토하는 한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즐거운 듯 생일 케익을 먹고, 밝고 맑고 명랑하게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한 달간의 두려움과 고통은 서른 두 살 아저씨가 되었어도 소년을 놓고 놔주지 않는다. 그런 아저씨를 돌봐주는 것이 눈치 없고 둔감한 치카게이다. 치카게는 편견 없이 가식 없이 두려움 없이 ‘도련님이 유괴됐을 때랑 같은 나이네요’ 한다. 유괴 사건 뉴스를 보다가.

마찬가지로 칸다 에이지도 오노 유우스케를 옹호한다. ‘사부님은 기생오라비가 아니라 호모라구!’ 편견 없이 가식 없이 두려움 없이. 팔자 병자 신자이니까 팔자 병자 신자로 부르는 것처럼. 병자 신자 팔자 아닌 척하는 가식보다. 멀쩡한 팔인 척 눈 감는 것보다.

나는 몇몇 친구와 친동생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런데 묘하게 불편함을 느낀다. 뭔가 나의 진실이 그들에게는 가닿지 않는다는 느낌. 그저 뭔가 표피에서 머무르고 만다는 느낌. 그저 표피에 머무르고 말 것이었다면 굳이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태도에도 그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솔직함이 없다. 사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나는 마치 이성애자인 듯 행동한다. 이성애자처럼 밥 먹고 이성애자처럼 웃고 이성애자처럼 걷고 이성애자처럼 생각한다. 이성애자처럼 트림하고 이성애자처럼 방귀 뀐다. 이건 뭘까? 새벽부터 골머리 깨지는군. 우우…

오늘은 여기까지.
피할 수 없는 한 판이 날 기다리고 있구만... 쩝...
일반
빠알간 뽀 4

댓글 4개

빠알간 뽀님의 코멘트

빠알간 뽀
잠 못 잔 흐리멍덩한 정신이라선지 오늘따라 빠알간 뽀가 술 취해 빠알간 뽀인가 하는 생각이... 술 안 마셨는데??? ㅎㅎ

지금님의 코멘트

지금
오늘 빠알간 뽀님의 3주년 독립기념일! 캔맥주라도 기울이시길...

뽀님의 코멘트

하하하! 맞아요! 3주년 독립기념일! 와, 기억해주는 분이 계셨네요? 저도 잊고 있었는데. 움움... 하지만 독립기념일이라고 하니 뭔가 날짜 맞춰서 중요한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 같네요. 어떻게 하면 일반처럼 걷지 않고 이반처럼 걸을 수 있는지, 요즘 화두에요. 고마워요~~!

지금님의 코멘트

지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