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또는 거리

영화 취향이 정말 잘 맞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영화 말고는 맞는 게 없다. 영화를 볼 때는 행복한데 그녀와 말을 시작하면 곧 불행해진다. 그래서 그녀를 초대해 영화 보잔 말을 못한다. 한때는 혼자서도 영화를 잘만 보러다녔는데… 아무것도 맞는 게 없는 그녀와 영화 취향이 너무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게 도리어 불행이다. 몰랐다면 아쉽지 않았을 텐데…

요즘에는 뭘 해도 혼자 하기가 싫다. 외롭냐고? 아니, 단지 공유를 원해. 그렇다, 나는 공유를 원한다. 경험의 공유, 느낌의 공유, 시간의 공유… 염화미소를 주고받을 누군가를 원한다. 이제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는 중늙은이가 되어가나…

나야말로, 이제야말로, 미친년 제니처럼 발가락 사이의 때를 긁으며 저녁마다 울어야 할까?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라고 되뇌이며… XXX! 처량하기도 하지…

이를 테면 내가 소리를 꽥꽥 지르며 [300]을 볼 때, 끔찍한 영상에 소리는 지르지만 그래도 그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꿋꿋하게 계속 볼 때, 그러면서 계속 소리를 지를 때, 누군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한다. 물론 [300]은 여자 여섯이서 아주 쑈를 하면서 봤지만. ㅎㅎㅎ

공유할 누군가가 꼭 한 사람일 필요도 없고 꼭 애인일 필요도 없지만 누군가 편안한 사람일 필요는 있다. 그런데 편안한 사람이 별로 없다…

지난 주말에는 동생과 시내에 나와서 영화표를 끊고 시간이 남아서 교보에 갔다. 책을 둘러보다가 영화를 보러 가는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광화문에 있다는 걸 알았다. 광화문 근처에는 아빠가 아주 좋아하는 낙지 볶음집이 있다. 두 딸은 갑자기 효녀모드로 급반전하여 영화표를 물리고 낙지 볶음을 사갖고 아빠의 저녁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그렇게 허무하게 나의 토요일 외출이 끝났다. 그리고 일요일은 어버이날이라고 또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먹기 싫은 외식을 하러 갔다 왔다. 놀자의 주제가 먹자가 되는 것도 싫었고 금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토요일도 그렇게 끝나고, 잠깐 우리집에서 잠만 자고 다시 일욜 점심에 만나는 것도 싫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면서 움직인 걸 알면 집안 식구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지만… 사실 나는 토요일에 영화만 볼 수 있었으면 그렇게 신경질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나도 함께 효녀모드로 급반전한다는 데 있다. 아빠는 낙지 볶음을 사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광화문에 있단 소리를 듣고 (통화를 한 동생의 말을 빌자면 뭔가 기대하면서) 잠시 말을 멈췄을 뿐이다. 그 뿐이다. 그 맥락에서 나는 영화를 봐야겠다는 고집을 못 부린다. 그 영화 꼭 봐야겠다고 못한다. 그래서 이제는 동생하고도 모여 놀지 말아야겠다, 너무 자주 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둘이 같이 있으면 더 쉽게 효녀모드에 빠져드는 것 같다. 착각하는 거지, 한 마디로, 우리는 효녀고 우리 가족은 행복한 가족이라고. 웃기는 소리. 미안 착잡 씁쓸하게도 웃기는 소리…

엄마는 오리고기가 먹고 싶었고 아빠는 낙지 볶음이 먹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토욜은 토욜대로 일욜도 또 일욜대로 우리는 온 가족이 붙어 앉아서 엄마, 아빠 먹고 싶은 것을 한 가지씩 사이좋게 먹어야만 했던 거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못 보고 오리고기를 먹고 체한 거다.

지 못난 걸 남 탓을 하랴만…

급반전 효녀모드, 너무 우습다. 스스로 그런 경향을 말릴 수 없다면 적어도 멀리 떨어지고는 싶다. 가능한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고 싶다. 더 먼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

요즘에는 정말 몇 년쯤 떨어져 살 수 없을까 생각한다. 아예 먼 곳에서 말이다. 명절이나 제사 때도 오기를 기대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한 마디로 외국에서 살 수 없나 궁리한다. 올해는 직장에 다닌다치고 내년부터는 알아봐야겠다. 어딜 가야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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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1

댓글 1개

에오의 제자님의 코멘트

에오의 제자
제가 뽀님 인생을 이래라저래라할 입장은 아니지만 실력있는 운명술사가 운이 크게 좋지는 않으니 주의하라 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 말을 듣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나쁜 회사도 아닐 것같은데 그냥 그만두지마시고 다니는 것도 좋을 것같다고 함부로 참견해봅니다 이때까지 평탄했다고 앞으로도 평탄할 거라는 착각을 하면 좋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실력있는 점쟁이말을 무시했다가 가족들을 지옥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실력있는 점쟁이들 말을 무시하면 겁이 납니다 부디 맘 상하지 않으셨기를 바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