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반쯤은 독신 여자인 채로2

2005-09-21
언제나 반쯤은 독신 여자인 채로2

메롱이 출장을 다녀왔다.
메롱이 출장을 간 첫날은 힘들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똑 같은 날, 출근하고 일하고 요가하고 차마시고 퇴근하고. 그런데도 힘들었다. 왜 같이 갈 생각을 안 하고 왜 휴가를 안 냈는지 후회를 많이 했다.

두번째 날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잘 있어야 된다고 나 자신을 격려했다. 메롱은 어제보다 문자를 적게 보냈다고 불평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힘들었다는 말에도 서운해 한다. ‘내가 오래 출장가면 아주 나를 잊어버리겠구나?’ 아니, 그렇지 않아. 어제는 회사 가서 혼자 있었지만 오늘은 엄마 집에서 사람들이랑 일했잖아.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은 덜 힘들었다는 것두 좋은 거야. 우리는 떨어져 있을 때도 서로 잘 있어야 돼. (메롱이 삐져서 듣고 싶어하지 않는 바람에 더 말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못 견디면 안 돼. 우리는 덜 의존해야 하고 더 독립적이어야 해.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얘기지만 그래도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노력과 단련의 기회로 삼는다.

추석 날은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명절이면 늘 그렇듯이 오늘도 아빠는 오지 않은 친척들 때문에 마음 상해 한다. 그런 아빠를 보는 나도 나름대로 마음이 상한다. 아빠는 할 수 있는 말도 너무 소심해서 늘 하지 못하고 다들 가고 나면 술을 마시며 쓰라리게 말한다. 그냥 말해버려도 될 텐데. 말해 버리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좋을 텐데, 언제나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서 큰 상심으로 키운다. 맏아들 콤플렉스.

올케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설거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매번 올케가 전담한 듯이 하는 것이 마음 불편해서, 올케가 없으면 엄마가 식기 세척기에 돌릴 텐데, 올케는 설거지 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도 되는 듯이 때마다 꼭 설거지를 하고 가려고 한다. 설거지를 열심히 했더니 그것도 오랜만의 일이라고 오후에는 정신이 쏙 빠지게 힘들다.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메롱의 친구 생일 모임에 갔다. 두 커플이 어찌나 음식을 많이 차렸는지, 그 집도 만나고 처음 맞는 생일이라고 거하게 차린 것이다. 메롱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짓수대로 음식 맛을 봤다. 맛만 봐도 벌써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이 차렸다. 참… 음식 잘 하는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쩝…

연휴 마지막 날 메롱이 왔다. 저녁에 도착하는 비행기다. 메롱을 따로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오랜만에 먼 길, 빠른 길을 운전하니 여간 긴장되지 않는다. 전에는 매일같이 낡은 티코를 타고 자유로를 시속 100 킬로미터가 넘게 달려 다닌 적도 있었는데. 따가운 저녁 햇빛을 받으며 자유로를 달리노라면, 그러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기도 했는데.

메롱을 태워 오는 길에 음식점에서 저녁을 사먹었다. 음식점이 소문 난 것보다 맛이 없어서 실망했다. 집 근처에 내려주고 우리 엄마, 아빠 드리라고 사온 과자를 받아서 엄마집으로 향했다. 내가 메롱과 많이 어울리고 있는 것을 엄마, 아빠는 모른다. 전에는, 7년 전에는 메롱과 내가 죽고 못사는 친구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메롱을 만나지 않은 세월만큼 집에서도 메롱 소식을 못 들었고 가끔 물어도(요즘엔 메롱 안 만나냐?) ‘안 만나’ 하는 퉁명스런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다시 만나면서 나는 메롱을 만난다고 가끔 얘기한다. 메롱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거나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거나, 그래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만나고 있는 줄은 모른다. 메롱은 서운해 한다. 하지만 내가 부모의 집에서 살지 않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도 가능하면 혼자 있고 싶어서 늘 바쁜 척 한다. 메롱을 만나기 전부터도 그랬다. 주중에는 야근하고 주말에는 집 치우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 집에도 잘 가지 않는데 그러면서 메롱과 이렇게 어울린다고 보고하면 듣는 가족들이 서운해 하거나 나를 욕하거나 아니면 메롱에게 하는 것 만큼 또는 그보다 더 가족에게도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럴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모든 것이 글로 써야 생각이 나는가? 메롱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은 내가 누굴 만나는지 가족에게 별로 보고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기도 하다. 나와 사는 몸. 매일 엄마 밥을 얻어 먹는 메롱과는 처지가 다르다.)

엄마 집에는 들리기 싫었는데 메롱이 서운해 하는 바람에-자기랑 만나는 것을 엄마한테 얘기 안 한다고- 굳이 들러서 과자를 전해 주었다. 과자는 맛있었다. 두 개만 먹고 일어섰다.

언제나 반쯤은 독신 여자인 채로. 밖에서 만나 밖에서 밥을 먹고 밖에서 헤어진다. 집에 오면 혼자다. 같이 산다고 해도, 아니, 같이 살면 조금 다르겠지. 얼마나 달라질까… 하지만 조금은 독신 여자인 듯이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녀 여신처럼. 혼인을 하든, 배우자가 있든 또는 없든, 자식이 있든 또는 없든지 간에, 조금은 독신 여자인 것처럼 살기. 인간은 본래 혼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 내가 본래 혼자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네가 본래 혼자라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기. 원망도 하지 않기. 눈물은 가끔씩 조금만 흘려주기.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