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가방순이의 역사

2006-03-09

첫번째 결혼식
처음 날 가방순이로 고용한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2 때 한반이었고 이후로 단짝 친구였다. 대학을 들어가고 멀어졌다. 서로 방황하느라 바빠서. 학교가 서로 멀었다. 내가 주로 술 마시고 춤추며 방황했던 것과 달리 친구는 집안 살림하고 두 동생의 도시락을 싸주며 방황해야 했다. 그간의 얘기도 나중에 몰아서 들었다. 서로 감당할 수 없는 비밀과 고민을 안고 우리는 멀어졌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친구는 바로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을 2년 만에 졸업하면서 친구는 결혼을 선언했다. 어찌나 서운하던지. 뭔가 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직도 한 번 안 해보고 시집을 가겠다니 서운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이나마 대학원을 졸업하던 봄에 결혼한 것 같으니 딱 이맘 때였을 것이다. 1997년 봄이었다. (휘유~ 벌써 10년 전이다.) 친구의 신랑은 키가 작았다. 친구는 아주 큰 키는 아니었지만 우리 나이 또래에서는 큰 키였다. 사진을 몇 장 찍다가 끝내 신부는 구두를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또는 갈아 신을 실내화가 없어서 맨발로 마저 사진을 찍었던가? 언제나 완벽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할 남자 키 작은 것도 몰랐나? 실내화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또 혼자서 얼마나 씩씩거리며 화가 났던지. 그 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것에 화가 치밀었던지. 한참 메롱과 사귀고 있을 때라서 우리는 같이 쭉 빼입고 신부를 졸졸 쫓아다녔다. 결혼식날 가방순이를 해 줄 정도로 친했는데도 일 년 반이나 이 년 후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왕래 없이 지냈다. 친구는 아이를 낳고 몇 달 후에 연락을 했고 나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친구의 신혼집을 찾아갔다. 아이를 낳고 났더니 발이 시려서 여름에도 맨발로 못 있겠다고 했다. 아이는 몇 개월이나 되었을까? 기억이 희뿌였다. 백일은 지났고 5 개월 정도 됐다고 했던가, 아니면 돌이 다 될 무렵이었나? 여름에 낳았다고 했는데 내가 찾아갔던 것도 여름 쯤이었으니까 돌 무렵이었을까? 친구는 아이를 보며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은 그 대사가 아이를 낳은 엄마들의 상투적인 대사라는 것을 안다. 그 때는 알지도 못했고 이해심도 없었다. 내 아까운 친구가, 큰 일 할 줄 알았던 친구가, 어디서든 그 똑똑함과 성실함으로 한 자리 해낼 줄 알았던 친구가 겨우 제 키만한 남자한테 시집가서는 아이를 낳더니 세상에서 제일 잘 한 일이라고 한다. 그 날 이후로 아직까지 그 친구와는 연락 없이 지내고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는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자신의 유치함도 실컷 깨달았다. 내가 그 때 얼마나 어렸고 어리석었고 이해심이 없었는가 하는 것도 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연락이 닿겠지…

두번째 결혼식
두번째 가방순이는 1997년으로부터 장장 8년이나 흐른 2005년 3월 말이었다. 봄이 좋은 계절이긴 한가, 봄에들 많이 가는군. 작년에 혼인해서 이제 일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도 역시 고등학교 동창이다. 우리는 고1 때 한반이었고 진짜 친해진 건 같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둘 다 학교가 죽게 싫었고 재미없었다. 십대 후반의 금 같은 삼 년을 그렇게 죽게 불살랐으면 대학이라는 곳에는 그에 알맞은 보상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또는 우리가 너무 거만했든지. 이유가 뭐가 됐든 대학은 기대와 달랐고, 달라도 너무 달랐고, 정말 달랐고, 그곳에 학문의 상아탑 같은 것은 없었고, 있었다 해도 뒤집어진 눈에 뵈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목적의식을 잃은 한량이 되었다. 음주가무를 즐겼지만 마약과 섹스에는 빠지지 않았다.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었다. 마약은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섹스는 움… 그 때는 그렇게 좋은 줄을 몰랐지… 웃어주자. 여하튼,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메롱과 사귀기 시작하고 대학원에 가고 메롱과 줄창 싸우고 어쩌고 하면서 방황을 계속하는 동안에 그 친구는 유학을 갔다. 1년 만에 석사를 따고 오는 길지 않은 유학이었지만 대학 4년 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 많은 변화, 뭔가 확실히 전환점이 된 유학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일 년은 참 길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6년 후반이나 1997년 정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내가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는 제일 먼저 사회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작년에 결혼을 했다. 제작년 쯤에 같이 다른 친구의 부친상에 다녀오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나이가 서른 두셋을 넘은 시점에서 보니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하나나 둘이 아니라 셋이나 넷쯤. 그런 생각을 빨리 했으면 20대에 결혼해서 애를 낳기 시작했을 텐데. 하루라도 젊고 건강하고 힘 있을 때. 웃어주자. 이 친구의 결혼은 많이 지지했다. 서운한 내색은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친구와 배우자의 몫은 다른 것이다. 이 친구가 결혼하는 시점과 내가 메롱을 다시 만나기 시작한 시점은 며칠 차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물론 메롱이 별다른 맘 없이 쉽게 한 얘기에 나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이었지만, 체증이 내려갔어도 그 뿐, 꼭 다시 사귀어야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메롱에게 말한다. 그 친구한테 고맙다고 해. 걔가 결혼한다고 안 했으면 나도 널 급하게 다시 만나지는 않았을 거야. 웃어주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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