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필요해

금요일 점심을 거하게 먹고 다시 소화불량 증세.
기운 빠짐, 목소리 높아짐, 피곤이 몰려옴.
안 그래도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지난 주에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책 생각이 떠나지 않아 피곤에 찌들은 몸을 이끌고 1호선을 탔다.
종각 영풍 문고.
최근에 새로 단장한 모양인데 전에 있던 의자가 없어졌다.
의자가 있다고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밀레니엄] 2부 하권을 들고 헤매다가 만만한 곳에 주질러 앉았다.

작년 언제쯤인지, 좀 기분이 처진 상태에서 영풍문고에 들어갔다.
책을 사러 들어갔던 것은 아니고, 아마 약속 시간이 좀 남았던 걸까? 잘 모르겠다.
잘 생각해 보니 기분이 처져서 책이라도 사야겠다, 그러고 들어갔던 것 같다.

신문에 난 책 광고도 보고, 주말판에 나오는 책 소개 면도 나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생전 듣도보도 못한 [밀레니엄]이라는 외국 소설이 작은 매대 하나 가득 깔려 있었다. 1, 2, 3부, 각 2권씩 모두 6권짜리 소설책. 1부의 부제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스웨덴 기자 출신의 작가의 첫 소설.
엄청난 베스트셀러, 영화화, 어쩌고 저쩌고.
무엇보다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명제이건만.

샀다. 1부 두 권만. 그리고 당시에 신문 광고를 열심히 하고 있던 [파리 젖 짜는 사람]도 샀다.

예상 외로 재미있었다.
한 번 잡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원래 장르 소설을 좋아한다. 잡지 [환타스틱]이 2009년 여름호 이후 나오지 않는 것도 내 우울증에 이유를 보탠다.

2부 상권과 3부 상하권은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2부 하권은 한달을 기다렸는데도 언제나 서가에 없었다.
전산시스템에는 뭔가 입력이 잘못되어 있었다.
2부 하권이 대출중인지 들어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입력이 잘못 됐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도서관 직원에게.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를 포기하고 서점에서 읽기로 했다.
처음 서점에서 읽은 날은 회사를 다니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영풍 문고의 종교 서가 쪽에 의자가 좀 있었다.

엊그제 동생이 좀 보자고 해서 회사 끝나고 나갔는데, 지하철 2호선이 고장나서 동생이 늦게 왔다. 걔가 지하도에서 헤매는 동안 나는 몇 달만에 영풍문고에서 다시 [밀레니엄] 2부의 하권을 읽었다.

몇 달만인지라 대충 펴서 읽는 곳이 저번에 읽었던 곳이라는 건 알았지만, 다시 읽어도 새롭기에 그대로 읽었다. 동생은 아쉽게도 금방 왔고, 실은 한 시간은 족히 늦었지만, 우리는 오랫만에 마주 앉아 맥주를 마셨다.

나는 동생이 아주 일찍 혼인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동생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고 동생 자신도.
동생은 올해 세는 나이로 서른 일곱이다.
내가 마흔을 바라보면 걔도 마흔을 바라본다.
내가 마흔을 바라본다는 사실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회사에 갔더니, 배 나온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 삼십대 초반이고 많다고 해도 나보다는 어리다. 한 살도 아니고 두어 살.
나이 차이는 알지만 동년배인 것 같은 정서를 느끼는 여자들은 삼십대 초반, 나한테는 한참 선배인 것 같은 여자는 겨우 두 살 위. 그러니까 진짜 동년배는 도리어 그쪽.
아무 생각 없이 같은 팀의 아가씨들과 매일 점심을 먹으러 다니다가 어느날 생각해 보니 참 이것도 주책이고.
그들을 동년배로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 그들에게 나는 서른 일곱, 서른 여덟 먹은 사람.

언젠가는 동생이 서른이 넘자 '너도 이제 서른이구나, 참 불쌍하다' 생각했는데, 마흔을 바라보니, '에구, 이 년아, 언제 니 앞가림할래?' 구박이 난무한다.

동생이 월급이 나오는 임시직과 월급이 나오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끌린다 싶은 일을 들고 와서 의논한다.
쥐뿔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겠다는 이 나쁜 물림.
하고 싶은 일, 더 끌리는 일, 배울 것이 많은 일을 하라고 격려했다.
어차피 매력이 없는 일은 오래 하지 못할 것을 안다.
36년째 내 동생 아닌가.
37년째 나 자신이고.
여태 굶어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
앞으로도 굶어 죽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
그 어느 것에도 인생을 걸어보지 못하고 할머니가 될까봐 걱정했다.
힘도 있을 때 써야 한다.

엊그제 그렇게 책을 아쉽게 읽고 났더니, 주말이 되자 너무너무 읽고 싶었다. 한 권 사면 될 것을 사지 못하고 이 무슨 짓인지.
그래서 피곤한 몸을 끌고 1호선을 타고 영풍 문고에 갔다. 힘을 내야겠기에 역 안에 있는 와플, 김밥, 국수를 파는 집에서 맛없는 우동도 먹었다. 차라리 김밥을 먹을 걸. 뜨끈한 국물 생각에 먹었는데 즉석 우동의 면발은 정말 별로다. ㅠㅠ

서점이 몇 시에 닫는지 몰라서, 9시, 10시마다 가슴을 졸이며 읽었다.
오늘 많이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사야하리라, 중간에 마음을 굳게 먹기도 했다. 처음엔 따듯했던 서점이 점점 추워져서 정말 몸이 피곤해졌다. 책이 3분의 1쯤 남은 시점에서 이대로 사갖고 집에 가서 따듯한 이불 속에서 읽을까...

만날 먹고 마시고 택시 타고 다니면서 만삼천원짜리 책을 한 권 사지 못해 이 난리를 치다니, 어리석음도 가지가지다. 하지만 책은 사는 비용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관도 해야한다. 좁은 집에 책을 보관하는 건 큰 일이다. 난 정리에 별로 소질이 없다. 사모으는 건 할 수 있다. 사고 읽지 않은 책이 이미 많이 쌓여 있는 것도 내가 책을 사는 걸 주저하는 이유다.

작년 그 날 나는 정말 우울해서 큰 맘 먹고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어갔던 거다.

월급을 받는 직장 생활도 좋지만, 나의 오장육부에는 정말, 물과 공기, 음식과 배설, 잠과 운동 외에도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반
빠알간 뽀 2

댓글 2개

L & Kira님의 코멘트

L & Kira
뽀님 글을 읽는 것이 저의 취미가 되었어요 ^^

뽀님의 코멘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