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내가 아니다

2005-07-28
비가 많이 온다.

밤이 늦었다. 잠들지 못하고 있다. 회사 일이 늦게 끝났다. 회사 일이 너무 늦게 끝나는 날은 도리어 쉽게 잠들지 못한다. 집에 와서 씻고 누워도 머리는 계속 일하고 있는 것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마음껏 쓰지 못하겠다. 검열이 너무 많다. ‘그대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쓸 수가 없다. 관계는 아무래도 무거운 것이다. 자신의 비열함과 어리석음이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찬 바람이 불어 들어 온다. 여름 큰 비, 좋다.

얼마 전에 학교 선배들을 만났다가 같이 점집에 갔다. 사주도 보고, 보는 김에 궁합도 봤다. 메롱의 사주를 남자 것인 양 들이밀었다. 누구 말로는 영험한 사람들은 사주만 보고도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다고 하는데, 내 사주를 봐준 할배는 영험한 사람이 아니라선지 메롱의 사주가 여자 것인 줄은 모르고 봐주었다.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궁합이라는 것 같았다. 실은 90 퍼센트는 같이 살라고했다. ‘저한테 잘 안 해줘요’라고 말했더니 내가 비위를 잘 맞추는 편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듣던 중 새로운 얘기였다. 메롱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쉽게 수긍이 가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솔직하고 툭하면 노골적이기도 하지만 속내를 비치는 일에는 조심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메롱하고는 너무 어릴 때, 너무 뭣도 모를 때 만나서 서로 안 보여준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주로 인간성의 한계에 부딪친 모습을 서로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은 가리는 것이 없고, 또 메롱이나 나나 덮고 넘어갈 줄 모르는 어리석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할배의 주장으론, 현재 나는 배우자를 만나는 운이다. 지금은 그게 제일 강한 것 같다. 할배는 내내 그 얘기만 했다. 혼인 자체가 나에게는 기반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직장을 옮기고 싶다고 하자, 직장도 혼사와 겹쳐서 바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혼사를 몹시 바라기는 한다.

메롱과 몇 시간씩 연락이 되지 않아서 괴롭던 밤에는 혼인한 사이라면 덜 괴로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겠니, 나랑 혼인한 사이에, 뭐 이렇게라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 때고 메롱에게 전화하고, 별일 아닌 일도 보고하고, 하루 종일 툭하면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는 메롱의 친구가 있다. 전화와 문자, 때로는 메롱의 핸드폰을 부숴버리고 싶다.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연락하는 사람들은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 연락을 메롱이 받아주고 있을 때, 나는 생각한다. 이성애만 못한 동성애라고.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메롱이 알아서 그런 연락에 냉담하게 대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런 부분이 빠져주는 것이다. 하지만 메롱은 그렇게 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그 모든 관계를 다 유지해야만 그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그런 말까지 하기에는 우리는, 말하자면, 혼인한 사이도 아니다.

사람을 사귀면서, 전에 친구들과 맺은 관계의 면면을 다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많이 싸웠다. 얘기도 할만큼 했다. 내가 얘기해서 이미 맺은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스스로 알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아니면 우리가 맺은 관계를 위해서든. 하지만 메롱은, 그 한 친구와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달라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든가. 아니면 나와는 어떤 사이가 되더라도 그 친구와 맺은 관계에는 변함이 없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고집스럽다. 나는 이제는 차라리 그 친구를 만나더라도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몇 시간씩 연락이 되지 않아서 미칠 것 같았던 어느 날 밤에,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해서는 그 친구와 함께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경기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둘이서만 만난 것도 아니고 친목이 아니라 일 때문에 만난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한테 몇 시간씩 연락이 없으면서 하필이면 그 친구를 돌봐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 야박했다. 그 전에는 그저 메롱의 후배, 좀 각별한 후배에 불과했다. 워낙 각별해서 불평도 했고 구박도 했지만 걱정되거나 꺼려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내 맘이 영원히 돌아섰다. 나는 다시는 너의 다정한 후배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너를 봐서 좋게 생각하자는 맘도 접었다. 그저 똥오줌 못가리는 어리석은 애, 너의 구애를 거절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무 때고 아무 용건 없이 연락하는, 그리고 네가 그런 연락을 지금처럼 받아주는 한 언제고 아무 때고 너와 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여자일 뿐이다. 네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녀가 메롱을 거절했을 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컸는지, 메롱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저네들은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내 이야기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것 같다. 그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마음 졸여야 할 일이 되겠는가, 그렇게 마음 졸이면서는 꾸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모든 희망을 접는 것이 관계를 지속하는 데는 도움을 준다.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희망은 또 생기게 마련이니까, 절연(絶緣)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가소롭게만 보인다. 전력이 있어서 그렇다. 나야말로 메롱에게 오랫동안 똥오줌 못 가리는 어린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가 동성애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6년 동안 나는 메롱에게 그런 친구였다. 덕분에 메롱의 옛날 여자 친구들과도 많이 어울려 놀았다. 물론 그 때는 몰랐지만.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이 한없이 순진한 얼굴로 낄 데와 안 낄 데를 못 가리고, 메롱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던 때에.

똑똑히 기억한다. 메롱과 만나기로 했는데 메롱이 다른 친구와 함께 나왔을 때 느꼈던 실망감을. 나는 그 때부터 메롱을 독점하길 원했던 것이다. 자각은 없었지만.

나는 혼인을 원한다. 너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해. 내가 너의 것이 되거나 네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착각 속에서도 관계는 성장한다. 그리고 그런 때는 그런 때대로 다 뜻이 있고 이유가 있다. 지금 나는 너를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간절하게.

하지만 메롱은 계속 ‘노’라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부모의 집을 떠나지 말라고 충고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와서는 좋아라고 들떠서 말한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애들을 만났어’ 물론 같이 살고 싶다. 하지만 네가 부모의 집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큰 부담을 줬니? 그 얘기를 하는 너의 얼굴이 너무 만족스러워 보여서 나는 그게 서운했어. 내가 네 사정을 그렇게 몰라주는 사람도 아닌데, 당장 같이 못 산다고 너를 들볶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들뜬 얼굴을 하고 말할 정도로 좋았니? 아니면 그냥 네가 지레 부담을 느꼈던 거니?

‘바람이 분다’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제도 혼인을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법적인 혼인, 가능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결심과 인정이다. 당사자들의 결심과 주위 사람들의 인정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이런 얘길 하면 메롱은 비웃겠지, 툭하면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게 뭐가 대순가? 제도 혼인을 하는 사람들도 오죽하면 결혼식장에 입장할 때까지는 모른다는 말을 한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다. 너는 결심할 준비가 되었니?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