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속이 좁은 거지


제일 친한 친구가 (슬프게도) 가끔씩 나더러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네가 완벽한 레즈비언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슬프게도.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떻게 살길 원하든 어떻게 살아가든, 남에게 이런 소릴 듣는 일은 정말 ‘기분이, 기분이 나쁩니다.’

친구도 레즈비언인데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이성애자라면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해석해보려고도 하겠지만, 레즈비언인 친구가 그렇게 말하면 상당히 비난하는 뜻으로 들린다. 아니면 나의 과잉 반응인가? 아니면 제발이 저려서?

발이 저릴까? 나 자신에게 컴아웃한 이후로 내가 극단적인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메롱을 처음 사귀기 전까지는 정말 남자들을 열심히 쫓아다녔기 때문에 – 나는 별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성격이다 – 처음에는 ‘성별을 따지기 전에 한 사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양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극단적인 이성애자일 것 같아서 만만하게 나를 꼬셨던 메롱이지만 내가 스스로 양성애자라고 말하면 질색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지금도 굳이 물으면 양성애자라고 하지만 실은 그냥 레즈비언으로 행세한다. 그게 편하다. 그게 편하다는 현실이 양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있단 소리겠지만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오랫동안 스스로는 양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도리어 극단적인 동성애자 쪽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작금의 현실이 그렇다. 초중고를 모두 남녀 합반인 공학에서 공부하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사실 남자와 여자가 뭐가 다른지도 모르고, 또는 나 자신이 남자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는 채로 살았으면서, 지금은 남자하고는 친구도 되지 못한다. 하긴, 여자하고도 친구되기 어려우니 오죽하시겠습니까만은…

세상에 왜 이렇게 안전한 사람이 없는지, 나야말로 위험한 사람인지, 헷갈린다. 생각해보면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과도 허물없이 지내지 못하니 남자와 멀어진 건 당연한 일인가? 묻는다고 답이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머리만 아프다.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나더러 ‘니가 뭐네’ 어쩌고 하는 소릴 듣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나 역시 남을 보면서 ‘너는 뭐다’ 이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그런 생각 안 하려고 해서 안 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전반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성정체성의 혼란으로 좁혀서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하는 난해한 생각이 꼬리를 든다. 성정체성이 아닌 사회적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통을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가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막연하게 사회적 소수자인 레즈비언들이나 동성애자들은 따듯하고 수용적인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기대하기도 하는 것 같다. 또 막연하게 레즈비언들이나 동성애자들 자체도 소수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자기들은 항상 더 인간적이고 더 따듯해야 하고 더 수용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일까 의무감일까 정의감일까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속이 좁은 거지… 악귀같으니라구… 흠… 내가 왜 이렇게 속이 좁은지 모르겠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들끓고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사태 심각하게… 아휴… 어찌 살라고… 나도 힘 좀 빼고 살고 싶다. 누구에게도 ‘완벽한 무엇’이 될 필요는 없으니 그저 생긴대로 살자.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고 친한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게 무지무지 가슴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완벽한 무시기’가 될 필요가 없으니 그저 있는 그대로 있자. 힘은 좀 빼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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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만화 채널에서 [바람의 검심 추억편]을 봤다. 적어도 세 번 아니면 네 번째 보는 것일 텐데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켄신의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는 켄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음색이라 듣기에 어색했다.


일반
빠알간 뽀 6

댓글 6개

지금님의 코멘트

지금
생긴대로 살자 는 대목에서 빙그레하고 웃어버렸다는...그나저나 하고픈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서도 말이에요. 무방비상태로 나온다는게 참 위험하고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뽀(어깨에 힘빼라고 했으니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요?)의 글이야말로 제겐 중독성이어서 뗄 수가 없군요. 슬프고 힘겹고 바둥거리고 아리고...항상 그런것은 아니지만! 그 예민한 감각으로 팍팍한 현실을 어찌 살아가나 싶습니다.

에오의 제자님의 코멘트

에오의 제자
바람의 검심말인데 일본판은 여자성우가 켄신을 연기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한국판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세이역의 여자성우목소리가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인기성우들은 매니저도 있고 연기수업도 철저히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놈의 대여점때문에 한국출판만화가 사실상 폐허가 된 관계로 한국애니세계는 그 꼴이죠 안타까운 일이죠 고마운 동영상공유사이트 덕분에 국부유출은 덜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허무한 상념님의 코멘트

허무한 상념
엄마한테 오늘 한 소리 들었어요. 종교인이 종교를 버리고 산다고 말이죠. 저도 걱정이예요. 제게 그렇게도 지주가 되었던 분이 내 속에서 없어져 버린것 같아서... 위험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시간 문제인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더 위험수위를 넘는 것 같아요. 더 솔직하게 살고 싶은데, 점점 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고요. 뽀님의 기분을 감히 느낀다고 하면...

빠알간 뽀님의 코멘트

빠알간 뽀
지금님, 걱정해주셔서 고맙. 하고픈 일은 있어요. 위험하고 무모한 짓 안 하려고 저도 무지 노력중인데 그래도 워낙 안 무모한 사람처럼은 살 수 없는 것 같아요. 에오의 제자님, ㅎㅎ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 것 같아요. 일본판은 본지가 오래되서 별 기억이 없구요, 우리말 판도 그냥 티비 연재판은 별로 어색한 느낌이 없는데 엊그제 본 '추억편'은 확실히 티비 연재판과 다른 사람이고 듣기에도 어색하더라구요. '사토 세이'는 '마리아님이 보고계셔'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죠? 약간 중성적인 느낌 아니었나요? 별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이물감 없는 좋은 소리였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빠알간 뽀님의 코멘트

빠알간 뽀
허무한 상념님, 종교를 가까이 하시고 허무를 벗으시옵소서...^^ 저는 다원주의자이고 기독교쪽으로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다니는 교회는 없지만 신이 나를 들판의 풀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사랑해 주신다는 걸 가끔 자주 느낀답니다. 믿기도 하구요. 그 좋은 걸 왜 멀리하세요? 가까이 하세요. 내가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해서 나고 자라고 사랑하는 커뮤니티를 다 떠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솔직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강해지죠. 저도 직장 생활 하면서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아요.

허무한 상념님의 코멘트

허무한 상념
사실 종교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맞지가 않다고 해야 더 솔직한 말이 될것 같아요. 제가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면 이단이라 할테고, 가만있자니 지금까지도 이중적인 삶이 힘들었는데, 그러고 싶지 않고. 엄마한테 고백하자니 엄두가 나질않고 말이죠. 인생이 참 버겁습니다. 내 자신과 평화를 이루었는데, 세상과는 등지고 살아야 한다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