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會者定離)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2005-06-08

사랑하는 밥,

사랑한다는 말에 무게를 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 네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아니다.

밥, 그렇게 가니까 좋아? 밥이야 전부터 알던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된 것이니 별로 불편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내 말은 옮겨간 그곳에서 상당히 불편했으면 한다는 뜻이야.) 밥이 간 후에 나는, 우리가 뭐 그렇게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고, 더구나 지난 몇 달간은 말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느껴. 밥의 빈자리를 느껴. 괜찮은 친구였는데, 우리 별로 애쓰지 않고도 말이 통했던 괜찮은 사이였는데 말이야.

밥이 가고 나니 친절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만 내 주변에 있더군. 글쎄, 잘 모르겠어. 친절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절하지도 않고 ㅆ ㅏ가지(등록하기 적당한 말이 아니라는 안내가 떳다. 사이트에서도 알아서 검열을 해준다. 고상한 단어만 사용해야하는 사이트인 줄은 몰랐다.)도 없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 내지는 말이 통한다는 착각을 주는 사람, 둘 중에 어느 쪽이 나은 걸까?

물어도 소용없긴 하지. 밥은 갔고 내가 친절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뭐, 사는 게 그런 거려니 하려구.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도 있잖아.
이래서 나이 들어 친구 사귀는 게 어려운 거라고 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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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아직 메롱과 다시 만나기 전에, 아직도 밥이 내 마음을 가끔씩 휘저을 때, 이반 친구들과 밥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밥을 더러 ‘내추럴 본 레즈비언’이 틀림 없다고 했다. 그럴 지도 모르겠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소시적에 결혼하자는 남자는 둘이나 있었다고 하는데도,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머리는 팽팽 돌고, 결혼은 무지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결혼을 못한 여자라면, 그 여자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꼬시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꼬시면 금방 넘어올 것이란 확신도 있었지만 꼬시지 않았다. 전도사를 자청할만한 자신감이 없었든가,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든가, 또는 밥을 처음 만나던 그 때는 나도 남자 만나 혼인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뭐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장 큰 핑계는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또는 처음에는 마음이 맞는 것 같았지만 막상 사귀어보고 환멸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나는 매일 얼굴 마주 보고 앉아서 일해야 하는 거리에 있는 여자를 꼬실 용기는 없었다.

또 그 때는 ‘남의 인생에 초치지 말라’는 물의 얘기에 공감하기도 했다. 동성을 만나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에 초를 치는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고생스러운 일이 될 수는 있다. 사랑이 아무리 좋아도 고생스러운 것은 고생스러운 것이다. 이를 악물어야만 한다면 고생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뿐이다. 검열등이 반짝인다. 이 등은 메롱 때문이 아니라 이반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솔직하자는 것 뿐이다.

밥은 다른 팀으로 옮겨서 아주 사무실도 달라져 버렸다. 나는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처럼 하루 종일 마음 맞는 한 마디를 할 사람이 없거나, 눈이 마주쳐도 웃어줄 사람이 없거나, 오고 갈 때 손을 흔들어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밥은 가기 전에 나에게 실망했다, 우리는 한 팀이 아닌지 오래다, 뭐 이러면서 정을 떼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그래야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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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