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십삼일

2007-09-13
옷 네 벌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한 현대식 한복 두 벌이 오늘 도착했다. 같은 사이즈지만 좀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은 좀 작고(휴~ 이거 입으려면 추석까지 급 다이어트 해야겠다) 좀 더 촌스러운 디자인은 잘 맞는다. 흑~ 왜 세련된 옷은 더 작고 더 끼는 걸까, 항상…

어디서 읽었는지, 무료 도로는 늘 체증인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고 하더니만.

집에 가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서 물티슈랑 맥심 아라비카 커피를 사려고 했는데 그만 마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슨 바자 어쩌구 하면서 옷을 파는 옥외 매장으로 빠져버렸다.

봄가을 겉옷 한 벌과 운동복 메이커에서 나온 트레이닝 반팔 원피스를 샀다. 사고 말았다… 원피스는 맞지도 않는 작은 사이즈다. 봄가을 겉옷은 이제부터 입으면 좋을 것 같아 사긴했는데… 남자 옷인 것 같다. 도대체 요즘에는 남자 옷도 어찌나 슬림하게 나오는지, 이제는 남자 옷도 입어봐야 한다. 남자 옷이라고 쉽게 맞을 줄 알면 오산이다. 눈물이 줄줄…

남자 옷 입기 싫은데… 여자 옷을 사려다가 자꾸만 좌절을 겪다보니 그냥 좀 더 쉬운 남자 옷으로 기운다. 이게 아닌데… 좀 더 발품을 팔고 좀 더 고생하고 좀 더 시간을 쏟으면 여자 옷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 같은 쇼핑도 힘 있을 때나 하지, 힘이 모자라 맘이 급할 때는 못할 노릇이다.

지난 주말에는 미술관에 갔다가 초저녁에 집에 와서 완전 쓰러져 잠들었다. 여덟시 쯤부터 잔 것 같다. 그렇게 잠들기 전에는 그렇게까지 지쳤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지쳤는지 모른 덕분에 같이 있던 동생과 싸우고 헤어졌다. 이 기회에 동생한테서 좀 독립해 보려고 한다. 똑 같은 가정폭력의 생존자라는 동지감이 그동안 나를 동생에게 너무 묶었다. 둘 다 남자와는 별 인연이 없는 채로, 게다가 동생이 오랫동안 백수이다 보니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동생과 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 좀 달라는 단순한 말을 들으면 밥상을 차려주지 못해서 안절부절하게 된 것이다.

그건 동생에게나 내게나 불공평한 일이다. 뭐든 다 들어줄 것 같은 겉모습 속에 사실은 힘에 부친 속모습이 있으니 동생에게도 뭐 그리 좋았을 리 없다.

언젠가 부모가 하도 싸워대서 말리다가 지쳐 대들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아니면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것이다. 둘이는 싸우라고. 내가 학교 관두고 공장 나가 돈을 벌어서라도 동생을 가르치겠다. 에효~ 메친 것. 나이라곤 한 살밖에 차이도 안 나면서 무슨 그런 말을 해서 부모 가슴에 못을 좀 박아 보겠다고 그렇게 용을 썼는지.

그런데 자식이 그런 택도 없는 말을 하면 애처롭고 안스러워해야 부모일 텐데, 아빠의 반응은 단순했다. 그래, 너 그렇게 해라. 부모가 역할 못하니 너라도 그렇게 해서 동생을 가르쳐라.

아니, 뭐 그렇게 흔쾌히 나올 줄이야… 쩝… 정말로… 내가 할 말이 없어서. 기가 막히게도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혔고 부모는, 결정적으로 아빠겠지만, 엄마라고 해서 나 죽었소 하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부모는 여튼 하시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생결단이 나게 생겼는데 자식이 무슨 헷소리를 하든가 말든가. 뭐 아빠한테는 술도 약이었겠지만.

요즘 가끔 그 생각이 난다. 나는 정말 누구를 키우고 그럴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 말은 그냥 용을 쓴 거지. 부모 가슴 아프게 해볼라고. 그렇게라도 해서 관심을 끌어서 좀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고 했던 거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집안의 백수, 집안 천덕꾸러기인 내가 이렇게 회사를 다니고 집안의 똑똑이, 집안의 세상물정인 동생이 저렇게 오래 백수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저 동생이 물을 달라고 하면 밥상까지 차려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은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바닥까지 힘을 긁어낸 다음에 짜증을 부리는 짓은 이제 관둬야지. 밥상 차려 주고 싶은 마음은 그저 의무감, 그것도 아니면 죄책감일 뿐이다. 진심이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일은 그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아니란 걸 알자. 나를 좀 알자. 나를 알아주자.

나는 동생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밥상은 그녀가 차리도록 내버려 두자. 굶어도 자기 뜻대로 먹어도 자기 힘으로 하도록 두자. 그녀의 밥상은 더 이상 나의 책임 아니다. 아니, 한 번도 내 책임인 적이 없었다…

오늘의 구호: 세상에 믿을 넘 하나 없다 Stand on your feet Depend on yourself
직장에서 차장을 더 이상 믿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오늘의 구호: 내 사전에 ‘잘 모르겠다’는 없다.
내 입에서 ‘잘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면 곧 ‘싫다’이다. 오해하지 말자. 설득하지 말자. ‘잘 모르겠다’는 없다. ‘잘 모르겠다’는 곧 ‘내키지 않아’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정신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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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2

댓글 2개

취옹님의 코멘트

취옹
오랫만입니다. 혹 일기가 거꾸론 간 것이. 맞는지..^^

뽀님의 코멘트

푸하~ 거꾸로 간 게 아니구요 차례대로 올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앞의 몇 개가 빠져서...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