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아무런 느낌도 없는 생일

2008-02-09

날짜를 찍으니 다시 생각났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럴수럴수… 생일이 이렇게나 아무런 느낌이 없는 날이 오다니… 이 대사도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는 것 같다. 몇 년째 생일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 친구들의 전화도 귀찮다. 가족의 아는 척도 귀찮다. 즐겁지 않은데도 즐거운 척 미역국이나 팥밥이니 케이크니 떡이니 먹어야 하는 일이 고역스럽기만 하다. 정말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린 걸까? 고역스러워서 그렇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데, 기쁘지 않다고 해서 슬픈 것도 아니지만 이왕이면 그저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데. 고역스럽다. 기쁘지 않다고 해서 슬픈 것도 아니라고는 했지만, 이왕이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면 나는 역시 비관적인 사람인 걸까? 우울한 사람인 걸까? 어쨌든 생로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전부 고통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생일에만이라도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조용히 있도록 내버려 둬주면 좋을 텐데… 아니, 그러다가 죽어버리기라도 할까봐 하루 종일, 며칠 전부터 들볶아 대는 것일지도…

오늘은 지난 사흘간 설 연휴를 지낸 덕에 조용히 혼자 있을 수는 있었다.

설 연휴 내내 [쾌도 홍길동]이라는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푸욱~ 아, 너무너무 좋았다. 성유리가 배우로 데뷔한 드라마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묘한 역을 맡았었는데, 지금도 동그란 눈을 뱅글뱅글 돌리며 ‘나는 멍청해서…’라고 말하는, 평생 단 한 번도 배불러 본 적이 없는 걸신 들린 소녀 약장수 역이 너무 마음에 든다. 써놓고 보니 정말 만화 같은 캐릭터네. 하긴 극 자체가 만화스럽기는 하지만. 호호...

웃음 끝에 기운이 빠진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아, 뭐 이런 우유부단한 것이 다 있어! 진짜!!

홍길동 역을 하는 남자 배우도 아주 훌륭하다. 배우 이름이 뭐였더라, 방금 전까지 기억했는데, 참 나, 그새 까먹었군. 여튼 새된 목소리가 그렇게 어울리는 배역도 없을 것이다. 홍길동이라는 제도권 밖의 아이를 새된 목소리로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전혀 웅장하지 않은, 멋있지 않은, 무게 없는, 폼 잡지 않는 새된 목소리는 홍길동의 기본적인 목소리다.

자기를 따라다니며 어리광 부리는 제도권의 아가씨에게 ‘내가 멋있는 건 알겠는데…’라고 말은 하지만 홍길동은 정말 멋진 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멋있다. 품위 없는 샛소리가 오히려 통쾌하다. 무게 잡지 않아서.

가식으로 얼룩진 나의 일상이여.

가식으로 얼룩진 나의 일상이여. 뺄 수 없는 땟국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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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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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님의 코멘트

빠알간 뽀
몇 년째 아무런 느낌도 없는 생일, 이라고 제목을 적으니 애인과 함께 했던 마지막 생일이 떠올랐다. 꽃, 친구들, 처음 가보는 식당에서 외식하기... 남들 연애사를 들으면 '아, 내 인생에는 왜 저런 뜨거움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뜨거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그 뜨거움을 달갑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인과 함께 했던 마지막 생일도 돌이켜보면 그 모든 백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생경하다.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즐겁게 연출하고자 했던 기억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