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은 경험

언니, 그니까 말야…
남자 같이 입고 남자 같이 웃고 남자 같이 걷고 몸짓이 남자 같은
한 여자 말이지… 언니는 그네가 왜 꼭 그래야 하는가고 물었지?
나에게도 비슷한 질문이 있어.
남자 같이 입고 남자 같이 웃고 남자 같이 걷고 몸짓이 남자 같은
동성애자 여자들 말이지… 그들은 왜 꼭 그래야 할까?

근데 나는 요즘 그런 사람들을 좀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너는 왜 동성애자인가?’하는 질문에 반발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너희들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차별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주 오래 전에 (십 년도 더 됐겠다.) 배우 신은경이 조폭마누라를 찍기 훨씬 전
신인 탤런트일 때 털팔이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었어.
병원이 배경이었던 드라마라서 주인공들이 다들 의사 아니면 간호사 이런 식이었지.
그 중에서도 신은경이 맡은 배역은 ‘남자 같은’ ‘털털한’ 또는 ‘의협심이 넘치는’
젊은 여자 인턴인지 레지던트였고.

어떤 평론가가 신문에 글을 썼어. “더 이상 저런 캐릭터를 ‘남자 같은 여자’로 보지 말자.
그냥 그 여자의 개성으로 봐야 할 때가 왔다.” 은근 공감 가지 않어?

작년에 이비에스에서 감독 셋이 영화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어.
남자 감독 둘과 여자 감독 하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동업자 셋이서 마주 않아 영화 얘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저네들끼리 찧고 까분다 식으로 특유의 화기애매한 분위기를 연출하곤 해.

그날도 무슨 영화인가를 소개하다가 갑자기 개중 오동통한 남자 감독에게
화살이 돌아갔어. ‘아, 저 여고생의 감수성!’
[천하장사 마돈나]를 연출했던 감독인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정하더라고. 자기 안에 여고생 있다, 고.
그러자 또 자기들끼리 누구 안에는 누가 있다, 뭐 이럼서 잠깐 떠들었던가?

근데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각성의 순간이었어.
아, 다 큰 남자가, 자기 일에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는 남자가,
자기 안에 여고생 있다, 여고생의 감수성이 있다는 걸 긍정하는 구나.

나는 [천하장사 마돈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 분위기로 봐서
그 사람의 작업 밑바탕에 그 여고생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깔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그가 내심 그 감수성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도.

여성 동성애자 그 중에서도 부치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게 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그들을 ‘남자 흉내 내는 여자’ 또는 ‘남자 같은 여자’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게 그들 자신이라고.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그건 내가 경험이 없기 때문이고 그만큼
그들의 경험이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남자 흉내나 내는 어중이떠중이 여자로 본다면 또 그만큼 그들의 경험이
말해지거나 기록되거나 드러나거나 하기는 더 어려워지겠지.

내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출입하지 않은지도 칠 년쯤 된 것 같아.
요즘 다시 어딘가에 얼굴을 빠끔히 들이밀고는 있지만 사실 감당을 잘 할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 커뮤니티의 친밀함이라는 게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 와. ㅎㅎ
아마 내가 지금 누구와도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 그런 거 같아.
나 요즘 그동안 친하게 지낸 동생과도 뭔가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거리를
만들고자 애쓰는 중이잖아. 분리되자, 떨어지자, 동생은 내 몸이 아니다. 그치? 호호

여기까지 쓰고 약속 때문에 나갔다 왔어. 지금은 꼬박 25 시간이 지난 후야.
다시 연결해서 완성해 보려고 했는데 뭐라고 더 해얄지 모르겠네.

한 가지 의문은 그들은 정말 그들일까? 나에게?

좀 더 어릴 때 성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다면 나는 꽤 괜찮은 부치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백일몽이 있지, 내가.

처음 연애에서 외모만 연약한 아기같이 생긴, 내면은 상당히 ‘강안’ 부치를 만나서, 연애하는 동안 내내 나의 섹슈얼리티, 나의 성적 욕망(이건 섹스를 하고자 하는 욕망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성에 대한 나의 온갖 관념, 상상, 판타지와 실현 가능성, 그에 대한 욕망 모두를 말하는 거야)을 거세당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정말 조금쯤은 거세당한 것 같기도 해.

지금 나는 부치는 아니지.
‘내 안에 부치 있다’고 말하는 아줌마에 가깝지.
내가 부치 정체성에 관심이 있는 건, 내가 사귀었던 사람들, 그들과 사귀었던 나,
그들과 내가 맺었던 관계, 결국은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보기엔 말이야, 언니도 외모는 그렇지 않지만
내면은 상당히 ‘강안’ 부치야. =.=;;;
뭐 언니는 기본적을 레즈비언이 아니니까 부치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몰라, 뭐, 울 아빠랑 결혼해 평생 사는 울 엄마도 내 눈에는 부치 (엄마)로 보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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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1

댓글 1개

L & Kira님의 코멘트

L & Kira
부치분들 너무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