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홀로 산길을 간다

2007-05-17

지난 주말에 북한산에 갔다가 길을 잃어서 혼자 밤을 새웠다. 길을 잃으려고 그랬는지 생전 안 들고 다니던 가스 버너와 연료를 들고 갔다. 덕분에 밤새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길을 잃으려고 그랬는지 북한산성 쪽으로는 밤길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 십 년 전이긴 하지만 낮에는 여러 번 가봤는데.

한 고개만 넘으면 되는데 4-500미터를 남겨두고 길을 잃었다. 밤에 손전등을 들고 산길을 헤매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대학 때 김광규 시인의 수업을 들었다. A4 한 장에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이름을 쓸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저 종이 한 장에 무엇을 쓰든 그리든 끄적거리든 자신을 표현하라. 나는 배낭을 매고 모자를 쓰고 산에 가는 ‘졸라우먼’을 그렸다. 그리고 산노래책에서 본 시를 생각나는 대로 옮겨적었다.

밤에 홀로 산길을 간다

시인은 내가 그린 ‘졸라우먼’의 손에 빨간 볼펜으로 손전등과 불빛을 그려주었다.

눈물이 줄줄…

십수 년이 지난 후에 손전등 하나 들고 산길을 헤매고 있자니.

세상에 대한 믿음이란 뭘까? 나는 돈도 많지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한 부모를 만났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모양인지, 언제나 과히 비관적이었던 적은 없다. 없는 것 같다. 힘은 들었지만.

강석경인지 서영은인지 헷갈리는데 둘 중의 한 작가가 소설에 그런 말을 써놨다. 내 이전의 수많은 여자들, 수많은 어머니들이 나를 둥개둥개 업고 머리 위로 이어서 오늘날 이 나무 그늘이 진 아름다운 길가에 내려주었다고. 나이 든 이혼녀에 어머니와 매일 싸우며 함께 살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같이 산책하는 이 나뭇가지 아래로.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렇고,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내일 불에 던져질 검불이 오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돌보는 것처럼 신이 나를 항상 돌봐왔다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더 강해졌다. “저는 제멋대로 믿어요! 우주의 거대한 사랑이 나를 향해 있다는 걸 믿는다고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돌보든 안 돌보든 간에 내가 믿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 나는 정말로 거대한 우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거지요!” 정말로 제멋대로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구제불능.

나는 호전적이기도 하고 공격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굴려고 하면 빠삭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사실 므흣한 얼굴 뒤에 나름대로 갖출 만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치사한 싸움에 휘말리기가 싫다. 뭐 상대가 너무 어리석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튼 상대는 싸우자고 덤비는데 나는 그것이 좀 ‘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진정한 맞수는 절친한 친구보다 나을 때도 있다.

맞수도 안 되는 것이 자꾸 걸고 넘어지니 피곤하기만 하다.

딱히 눌러줄 무기도 없고 칼을 갈기도 싫다. 그런 것한테 이기면 뭐하나? 이게 문제다. 딜레마다. 나는 칼을 잘 가는 인간이었고 쌈질도 잘 하는 인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칼 가는 것도 쌈박질도 다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냥 하기 싫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고 해서 나를 긁어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사무실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잘 긁어주고 있다. 내 코 앞에서도 잘 긁어주고 있고. 남을 무시하기 때문에 남이 대놓고 말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 그녀를 나는 도리어 나서서 챙겨줘야 하는 형편이다. 아참! 세상 불공평하기도 하지. 쩝… 나는 그녀를 왕따시키기도 원치 않으며 그녀가 끊임 없이 불평하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어째서 자신을 향한 끊임 없는 배려를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커피를 타서 코 앞에 바쳐놓고 일부러 권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나이를 대략 헛먹은 것도 아니고(ㅎㅎ) 그 누구의 뇌도 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스스로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으며, 그 세계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가련하고 가장 능력이 좋은데도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기 때문에 남들이 아무리 잘 해줘도 절대 눈치를 채지 못한다. 그녀의 각본에 행복한 자기자신은 없는 듯하다. 그녀가 나를 긁을 때, 나는 그녀가 패닉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드라마 ‘문희’ 식으로 말하자면 ‘소심한 여자의 자기방어’라고나 할까…?

그녀가 나를 긁을 때, 그녀가 신입사원을 부당하게 구박할 때, 그녀가 싸X지 없이 자기 맘대로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차장을 싹 무시하고 부장, 상무에게 달려갈 때—사실 차장은 내 편이긴 하지. 그녀와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나하고는 가능하다면 그걸 굳이 편을 갈라서 말해야겠는가?—그녀가 팀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할 때, 그녀가 버릇없이 자기 기분대로 나올 때, 그녀가 여러 명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만 존중하라고 발악을 할 때, 평소에 남의 말에는 귀에 대못을 박고 들으면서 자기 말은 금과옥조처럼 들으라고 할 때, 사원 주제에 대리, 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차장, 부장까지 자기한테 보고해야 한다는 황당한 사고방식을 들이댈 때, 나는 화가 난다. 소화도 안 되고 얼굴도 벌개진다. 그래도 싸우기는 싫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말 이기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사실 그녀가 날 걸고 넘어지지만 않으면 나름 공정하게 회사 선배의 도리를 다 하려는 마음이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고 그녀가 어떤 부분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지도 안다. 그녀가 나를 표적으로 삼지만 않아도 나는 그녀의 앞에 있는 장애물을 많이 치워줄 수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녀 자신이 가정하는 것처럼 그녀를 표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녀는 나를 계속 걸고 넘어진다. 내가 박해해서 우리 팀에서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마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박해하는 만큼도 그녀를 박해하지 않을 것인데... 휘유~ (한숨)

그녀의 목소리가 작은 이유는 그녀가 평소에 남들한테 잘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내가 남들한테 자기 욕을 해서 남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럼 남들은 나의 로봇이란 말인가? 그녀 자신은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을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자기가 사무실 구석구석에 퍼뜨린 말이 다 부메랑이 되서 다시 자신에게 꽂히고 있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녀 때문에 소비해야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싫다. 한마디로. 나를 다른 팀으로 옮겨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이제 무엇에도 나를 그렇게 빼앗기기가 싫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는 게 싫다. 싫다. 그저 싫을 뿐이다. 그녀가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소모하기가 싫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면은 그런 면이다. 이기고 싶지도 않다.



일반
빠알간 뽀 1

댓글 1개

적도의꽃님의 코멘트

적도의꽃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뽀님 덕택.. 오랫만에 신영옥 님의 고운 목소리로 들었네요... 倚笠遠江風(기립원강풍)..'먼 강바람에 삿갓 기우네' 마음에 풍랑이 심할 때면 저는 이 구절에 마음을 기댄답니다...(원래 작품과는 무관하게 내 스타일로 의역해버렸나..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