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게 마시다

술을 죽게 마셨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소주가 문제다. 2001년에 알러지 치료를 하면서 술을 6개월간 끊은 이후로 내 주량은 그 전의 10분의 1도 못 된다. 술을 끊었더니 부수적으로 체력이 좋아지길래 아예 그 후로 늘리질 않았다. 나름 경제적이고 시간도 덜 걸리고 해서 좋아하고 있는데 문제는 소주를 마시면 내가 취한 줄 알기 전에 취해 버리는 거다.

할아버지 부장과 둘이서 소주 5병을 나눠 마셨다. 나는 1병을 마실 때 이미 취했던 것 같다. 그러니 5병까지 갔겠지. 평소에는 소주는 1잔에서 2잔 마시면 더 마시지 않는다. 옛날에 밤을 새고 마셨던 가락을 잊지 못하고 술이 취하는 줄도 모르게 마셔 버린다.

무시기 헛소리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 필름이 끊어진 게 아니라 말을 하도 많이 해서 일일이 기억을 못한다는 – 길에서 토하고 결국 할아버지 부장이 울 집 앞까지 같이 택시를 타고 와 주셨다. 집에 들어와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온몸이 다 너무 불편해서 샤워기 물을 맞으며 얼마나 있었는지, 것도 대략 잘 모르겠고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다 씻었다.

금욜 밤에 그러고 토욜 낮에 나가서 이사 갈 집을 계약했다. 이사 날짜가 2주 후라서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셋집은 이태원에서 훌쩍 떨어진 보광동이다. 입지 조건 좋고 주변환경 편리하고 다 괜찮은데 문제는 사생활이 있기 힘들게 생겼다는 점이다. ㅠㅠ 이제 연애는 어떻게 하나… 여태까지 살던 집은 다 원룸만 가득 든 주택이어서 입주자들이 서로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옆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한 밤중에 게임 소리가 너무 요란하지만 않으면 다들 서로 없는 듯이 살았는데, 여기는 동네며 집 자체며 분위기가 아예 다르다. 힝힝… 사람 좋아 보이는 집주인도 같은 집 3층에 산다. 주인집과 전셋집의 대문은 다르지만 주인 아저씨가 아직까지는 인상이 너무 좋아서 서로 관심을 많이 주고 받으며 사는 것 같은 분위기다. ㅠㅠ

원룸이 많은 홍대 쪽으로 할 것을 잘못했나… 모르겠다. 내친 걸음, 가보는 거지 뭐. ㅋㅋ

500에서 1000만원, 정 없으면 1500만원까지도 전세금을 더 쓸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500만원 차이 나는 방으로 구했다. 주인이 전세금을 올리는 사람이 아니어서 집 상태보다는 훨씬 싸게 주고 구했다. 돈을 더 쓰고 회사에 그만큼 몸이 묶이더라도 좀 더 넓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소망은 접었다. 날짜가 없어서 맞출 수도 없었다. 월셋방은 구하기 쉽다는데 전세는 그렇지 않단다.

공황에 빠진 어린애와 전투는 관두기로 했다. 차장이 붙잡고 얘기한 수요일, 목요일 쉬고, 금요일에 본 그녀는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뭔가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일에 관해서 나에게 아주 똑똑한 질문을 했다. 너가 그렇게 열성이면 내가 바로바로 이뻐해 주지.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도 복잡한 사람이다. 내가 싸우기 싫은 건, 그리고 사무실 안에서 정치적으로 굴지 않는 건, 단지 인생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머릴 쓰지 않아도 머리 쓸 일이 너무 많고 일이 많다는 것 자체로 내 삶은 늘 과부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일이 많지 않아도 내 삶은 이미 이중이다. 일상적인, 일반이길 기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인 척하는 나와 사실은 일반이 아닌 나. 그러니까 일로 과부하가 걸리지 않아도 언제나 나는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애인이 없을 때라도 나의 개인적인 시간에 대한 소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부장과 소주를 다섯 병이나 나눠 마셨다. 소주가 문제긴 했다. 밤을 새고 마셔도 꼿꼿이 자리를 지키던 예전의 주량도 문제긴 했다. 간단히 냉면으로 저녁이나 먹고 반주나 한 두잔 하려던 생각이었다. 어쨌든 내가 부장과도 친하게 지낸다면 공황에 빠진 어린애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 칼을 들었다. 너는 지나치게 나를 믿지 못한 나머지, 또는 지나치게 세상을 불신한 나머지 나를 적으로 돌리고 내게 약점을 보였다.

내가 분명하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남이 너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남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너 자신이다. 남이 니 인생에 태클 건다고 착각 마라. 네 인생에 태클 거는 건 너 자신이다. 너의 신념, 너의 세계관, 너의 행동에 책임을 져라.

희생 없이 승리 없을 뿐 아니라, 희생 없이 전투 없다. 기가 막힌다. 이겨도 희생이 따르고 지면 희생은 더 크다. 누가 전투를 원하겠는가? 나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지거나 늘 얻어 터지는 건 더 싫어. 나쁜 사람 안 되고 싸워보겠다고 이 생 난리다. 변명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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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