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회의 해체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초동회는 게이와 레즈비언 사이에 입장차가 있음을 깨닫고
각각 분리해서 활동하기로 하고 해체하게 되었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게이쪽은 친구사이라는 단체로
이쪽에서는 끼리끼리라는 단체가 탄생했고.....

그것이 지금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바뀌어
이어져오는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둘 사이의 입장 차이....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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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님의 코멘트

상담소
날자님, 상담소입니다. 초동회 해체과정에서의 서로의 입장차이에 관한 글을 발췌해서 적어드리겠습니다. 출처는 '레즈비언 전문서적 출판사 [또다른 세상], 1999년 5월' 자료의 "한국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역사(이해솔)"부분입니다. ".... 그 결과 레즈비언 세 명, 게이 세 명이 모여 1993년 11월에 한국인 최초의 동성애자 모임인 [초동회, 草同會]를 결성하게 된다. [초동회]는 레즈비언과 게이가 함께 구성된 모임으로 주로 왜곡된 동성애자의 이미지를 바로 알리고 오도된 에이즈 운동을 비판하는데 주목적을 두었다. 유일한 홍보 수단으로 제작된 소식지에는 에이즈 예방과 안전한 섹스(Safe Sex)에 대한 홍보, 동성애 정체성에 대한 계몽과 정보 전달이 주 내용들이었다. 종로나 이태원의 게이 커뮤니티에 배포되었다. [초동회] 멤버였던 당시의 레즈비언들은 활동 경험을 통해 레즈비언 독자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다.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레즈비언의 존재를 알리는 데 용이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들을 통해서는 레즈비언을 위한 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동성애자로서는 같지만 한국에서 여성과 남성이 갖는 조건의 다름으로 인해 활동 방식과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짧은 활동 경험 속에서 게이들로부터 남성들의 가부장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금 마련을 위한 행사를 할 때 재정이 주로 게이바를 통해 모금되기 때문에 게이 대중을 위한 사업이 우선시 되면서 레즈비언에 관한 사업이 배제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재정 마련이 힘든 레즈비언들에게 무력감,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의사소통, 일하는 방식 등도 레즈비언들을 힘들게 했다. 그 결과 [초동회] 멤버들은 레즈비언과 게이 조직의 분리를 절감하게 되고, 해체를 결정한다. [초동회] 결성 이후 두 달 만의 일이다. 이후 게이들은 94년 1월에 남성 동성애자 인권모임 [친구사이]를, 레즈비언들은 94년 11월에 여성 동성애자 인권모임 [끼리끼리]를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