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구두의 시대는 갔다


나는 남자 구두가 세 켤레 있다. 1999년에 산 구두는 완전 남자 구두다. 그때는 왜 남자구두가 편해 보였는지. (높은 굽의 여자 구두를 신고 메롱과 싸우며 강남 주택가를 헤맸던 기억 때문이었을 거다. 길을 잃어서 헤맸다.) 싸구려 메이커에 투박한 남자 구두다. 남자 구두인 주제에 너무 싸구려라서 였는지 발이 불편해서 몇 번 신지도 못했다. 지난 6월에 이사를 전후해서 버렸다.

두 번째 남자 구두는 메이커 할인점에서 샀다. 처음 산 남자 구두보다는 비싸게 주고 샀다. 남자 구두였지만 모양도 훨씬 좋았고 발도 편했다. 굽도 높았다. 남자 구두의 굽이 그렇게 높고도 편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3센티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 구두는 아마 지금 엄마 집에 있는 것 같다. 제일 뚱뚱할 때 사서 많이 신었다. 발도 커져서 그 때는 남자 구두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으면 넘어져서 발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릴 때였다. 어쨌든 그 신발은 편했다.

구두며 신발에 돈을 많이 쓰는 직장 동료가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어느 날 나를 보고 높은 구두를 신으라길래 무서워서 못 신는다고 했더니 자기는 ‘발목이 부러져도’ 힐을 신는다고 했다. 발목이 부러져도라… 그녀를 보면서 나는 비싼 옷, 비싼 가방, 비싼 구두를 늘 사 입고신고, 심지어 밍크 코트를 입는 여자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 번째 남자 구두는, 어제 그 구두를 닦았다. 흰 색에 구찌를 흉내낸 빨간색과 초록색 천을 댄 구두다. 흰색이라 그 구두를 닦으려고 투명한 가죽 오일도 샀는데 사기는 몇 년 전에 샀는데 닦기는 어제 처음 닦았다. 흰 남자 구두, 이 구두는 굽이 낮다. 흰 남자 구두를 닦으면서 이걸 신을 일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지난 이삼년 동안은 신은 기억이 손가락을 꼽는다. 굽이 많이 닳아서 신으려면 굽을 갈아야 하는데 돈을 주고 굽을 갈아서 과연 신을까, 싶다. 다시 신어봐도 편하긴 한데…

그렇게 구두를 닦다가 드디어 남자 구두의 시대는 갔구나, 깨달았다.

삼사년 전부터 남자 구두를 거의 신지 않았다. 대신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운동할 때는 적당하지 않은 얇은 운동화를 제일 많이 신었고 그 다음에는 여름이면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그리고 가끔 여자 구두를 샀다. 까만색 에나멜 구두는 빨간 줄이 들어가 아주 스포티하고 굽이 높다. 굽 높이에 비해서 발이 굉장히 편하다. 2005년에 산 밤색 구두는 굽이 낮다. 발가락은 덜 아픈데 그렇다고 걸을 때 딱히 더 편하지도 않다. 굽이 높은 구두는 헐떡거리지 않는데 이건 좀 헐떡거려서 그게 살짝 피곤하다. 그래도 굽이 낮아서 신는 빈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년에 산 털이 달린 빨간 스웨이드 구두. 이 구두는 지금까지 딱 두 번 신었다. 내 생일에, 후배 결혼식에. 부츠컷 청바지랑 같이 신으니 이건 뭐 빨간 털도 안 보이고 김이 빠진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겨울에 다리를 까고 신을 수도 없고… 이건 에나멜 구두보다 더 높다. 발가락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지금은 얼마 전에 이마트에서 9800원인가 주고 산 아줌마 슬리퍼를 신고 있다. 싸고 편하고, 실은 발가락을 좀 까먹긴 했지만, 이젠 괜찮다. 찬바람 불기 전까지 신고 내년 여름에도 신어주면 아주 흐뭇할 것이다. 굽 6센티. 여기까지가 편안한 높이다.

그렇게 남자 구두의 시대는 갔다. 어제 닦은 하얀 구두는 굽을 갈아서 아주 추워지기 전까지 신을지 아직 고민 중이다. 다음에 엄마 집에 가면 거기 있는 까만 구두도 겨울에 신을 수 있을지 좀 찾아봐야겠다. 하고 나니 이 생각은 지난 겨울이 오기 전에도 했던 생각이다. 그 구두 어떻게 됐을까? 없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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