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헐렁한 칼도 있을까? -2


엄마집에서 자고 추석을 맞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겁나 싸게 산 현대식 한복을 다려서 잠깐 입고 있다가 차례가 끝나고는 곧 벗어던졌다. 5촌 조카들이라고 일년에 몇 번 보는데 있을 때 놀아야지.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큰조카는 덩치가 너무 커서 오래 안아주지도 못한다. 큰조카를 보니 작은 조카가 아직 작을 때 더 많이 안아주고 업어주고 목마를 태워줘야겠다는 생각에 한시가 아깝다. 작은 조카를 목마 태우고 있는데 애들 아비가 ‘고모 힘드니 내려오라’고 한다. 내가 싫다고 도리질을 하는데 이 넘이 지 자식이라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애 등짝을 펑 친다. 아이고~~!! 이너무 자슥아~~!! 넘의 다리를 차주려고 내 다리를 들었는데 한복이 좁아서 다리가 안 올라간다. 치마를 걷고 넘의 오금을 차 주었다. (이때까지 입고 있었구만)

사촌동생부부가 올케의 친정에 간다고 일어서고 나서 엄마집에는 큰고모와 셋째 작은아빠 내외만 남았다. 얼마 전에 집에 사단이 좀 있었는데 머리털 나고 첨으로 큰고모한테 대들었다. 사실은 아빠가 대들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울 아빠는 아직도 왕소심+왕연민에 자기 감정에 솔직해도 된다는 확신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서 내가 대들었다. (앓느니 죽지)
지금 생각하니 내가 또 남의 싸움에 껴들었나… 남의 싸움 껴들어 중간에서 박터지기는 나의 일생 특기인데 그래도 집안 싸움에는 낀 적이 별로 없었다. 너무 일찍이 포기해버린 탓이다. 집에 분란이 나면 나는 ‘방문 닫고 들어가’였다. 나야말로 요즘에는 내 감정에 솔직해도 천지개벽 따위 없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대든 거긴 하다. 그리고 작은 고모처럼 아예 안보고 살면 모를까 큰고모는 당신이 우리집에 오는 한 계속 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솔직하고 싶었다.
고모의 대답은 겁나 비겁 그 자체였지만 내가 대놓고 대들었다는 것 때문에 나름 충격을 받기는 했을 것이다. 고모가 엄마집을 떠나기 전에는 나도 고모도 서로 유화적인 제스처를 주고 받았다. 고모가 뒤돌아서서 나를 뭐라고 욕하든 나는 내가 솔직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큰 소리 내고 싸우지 않고 어쨌든 말의 수준에서 끝났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건 쌍방이 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다. 내 감정에 솔직하다고 해서 천지개벽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큰 소리 내고 싸우는 일이 있다고 해도 천지개벽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ㅎㅎ
나는 그 날 셋째작은아빠에게도 솔직하게 말했다. 형제들끼리 싸우고 의 상하지 말라고. 나는 내 사촌 동생도 좋고 올케도 좋고 5촌 조카들도 좋기 때문에 부모들끼리 의 상하는 건 싫다고.

나야말로 사촌들에게 정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다 커서 어른이 되고 하나 둘 결혼하기 전에는 사촌들을 전혀 몰랐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부모들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우리집은 개중 못 살았고, 우리 부모는 맏이라 위로는 고모들을 아래로는 남동생들을 나름 다 바라지했기 때문에 재산이라고는 모을 형편도 못 되었고, 물론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사정을 알아서 소원하지는 않았지만.

여자 넷, 남자 넷 중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혼인을 했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사촌들은 어쩌면 나랑 다르다고 생각했는데도 많이 닮았고 그러면서도 또 달랐다. 같은 할머니와 형제지간인 아버지들과 어린 시절의 추억, 20대 후반에 친동생을 다시 만난 것처럼 이들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나는 그들의 배우자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올케도 좋고, 유학 중에 결혼해서 딱 한 번밖에 못 본 사촌 동생의 제부도 너무 맘에 들었다. 딱 한 번 만난 그 밤에 사촌 다섯이 모여 새벽까지 떠드는데 졸음을 참으며 견디던 모습이란 ㅋㅋ 편집증적인 데가 있는 사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아픈 거) 많이 나았어요’ 하는데 왜 내가 위로 받는 느낌이 들던지.

가족은 먼 게 좋다. 멀리, 단지 있다는 것이 좋은 게 가족인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건 서로 손 벌리는 일 없이, 죽을 때까지 가능하면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관혼상제에 모일 수 있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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