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끝만큼 키워주는 사람

입맛 없고 기운 없고 식은땀 날 때 엄마집에 가서 한 끼 얻어먹으면 싹 낫는다.
밑반찬뿐이건만.

티, 윤미래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이 빠져 더 예뻐졌다고 한다.
으음… 윤미래는 나보다 좀 한참 어리지 않나?
다들 어찌나 혼인도 잘 하고 아이들도 잘 낳는지. 신기할 뿐이다.

어른이 된다, 성숙한다에는 증거가 없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눈에 보이는 증거가 생긴다.
물론 혼인을 한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아이를 낳는다고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혼인을 하면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된다.
우리의 인격, 마음가짐, 준비와 상관 없이
물리적으로 그렇게 된다. (맞는 말이냐?)

어른이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부모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봤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어른다움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을
다 세려면 백사장 모래알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하고 차를 사고 집을 사면서
어른 노릇을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른 노릇 할 수 없다.
그런 어른 노릇 할 일이 없다.
집은 몰라도 차는 살지 모르지, 언젠가.
지금도 집을 사진 않아도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많이 어른이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회사 관뒀으니 더 이상 승진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내 앞가림한다고 열심 벌어먹고 있으니
쪼금은 어른인 듯도 하다.
그래도 부모가 될 일은 없겠지.

뭐, 어때.
나는 어딘가에서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산모와 영아의 건강을 위해
매달 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아이를 하나 찍어서 지원하는 것도 좋겠지만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산모와 영아의 먹을 것을 생각하고 싶다.

알고 있는 단체에서는 매달 한 번씩 부모와 떨어진 영아들을 목욕시키러 가는 일을 하는데,
거기 끼고 싶다. 생각만 했지,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차근차근히, 마음 속에 품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처음에 영아 목욕시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은근히 두려움도 느꼈는데
이제 두려움은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저 한 손 덜러 가는 것뿐이다.
수고로운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거다.
아기들이야 이쁘지, 그래도 그 얘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감동 먹었다는 둥
하는 말은 지껄이고 싶지 않다.
아기들이야 이쁘지, 애들이 이쁜 건 걔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거다. 그 동물적인 본능, 사실에 나의 감상을 떡칠하기는 싫다.

나는 태어났고 자랐고, 남의 손과 남의 수고를 빌어 자랐다.
그게 비록 대부분 부모의 손길이기는 했지만 어찌 그게 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지나던 시장통에서 나를 알아봐주던 가겟집 아주머니들과
서점 아저씨, 아주머니 부부와
과일 가게 아주머니와
집 근처 가겟집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남편과 그 집 애들과
집에 있는 책을 읽게 해준 이웃집 아주머니와 내가 이뻐했던 그 집 꼬마애들과
중학생 때까지도 말뚝박기를 하고 놀았던 옆집 삼형제와
또 수많은 선생님들과, 좋았든 나빴든.

나도 그런 지나가는 사람, 잠깐 바람처럼 불어 지나가면서
털끝만큼 키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털끝만큼.

일반
빠알간 뽀 1

댓글 1개

L & Kira님의 코멘트

L & Kira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참 좋은거 같아요... 뽀님 요즘엔 바쁘신가봐요. 맘속까지 따뜻해지는 이야기들 계속 기다리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