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남동생이 결혼했다. 멀고 가까운 온갖 친척들을 만나 어찌나 떠들어댔는지 목이 다 아프다. 좋은 사람인 척하는 가면을 벗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결혼식장에서는 즐거웠는데 막상 돌아와 한숨 쉬고 나니 씁쓸하다. 샘이 난다. 누구는 저렇게 결혼도 하고… 피곤해서 오른쪽 편도선이 아프다.
친척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날은 그저 외국에 이민이라도 가서 살았으면 싶다. 피곤하다. 다 안 만나고 쓸데 없는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거 이민 안 가면 못 하는 일인가? 다시 한 번 좋은 사람인 척하는 나에게 좌절한다… 어쩌면 좋을까… 다음 번에 다시 동생이나 사촌 동생이 혼인한다고 하면… 쩝…
도망도 치지 않고 오바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건가, 정말… 궁리 좀 해보자…
애가 여섯인 사촌 언니를 만났다. 일찍 혼인해서 애 셋은 이미 독립했고 지금은 셋 하고만 같이 산다고 한다. 언니와 형부는 태안에 살지만 어업을 하지는 않는다. 시골이라 과외를 시키려야 시킬 수도 없어 애 키우기는 좋다고 한다. 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언니의 엄마이자 나의 고모, 우리 엄마의 시누이이자 아빠의 누나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우리집에 맡기다시피 했다. 우리 엄마한테 조카들 도시락에는 꼭 계란 후라이를 넣으라고 가시 돋친 말은 했어도 손수 싸주지는 않았다. 고모는 여섯 남매의 맏이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받는 딸로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을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하고 싶은 대로. 고모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우리 아빠는 중졸이다. 고모는 중졸인 동생이 밤잠 못 자고 빵공장에서 노동하는 월급을 삼 년치나 당겨 받아서 그 돈으로 당시 잘 나가던 공사 졸업생, 장교와 결혼을 했다. 몇 년 전에 한 번 물어봤다.
“고모, 그때 왜 그랬어?”
“몰라, 그때는 왜 그랬는지. 고모는 그 돈이 그 돈인 줄 몰랐어.”
몰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이었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몰랐다고 한다. 수원에서 선경방직의 전신인지, 그 당시에도 선경방직이었는지 하는 회사를 다니던 고모였다. 장교와 결혼하겠다고 방직공장을 관두고 공군사관학교와 관련된 어딘가로 직장을 옮긴 고모였다.
사촌 언니는…
언니는 고모 이야기를 한다. 고모는 이태 전에 칠순을 넘겼다.
언니는 자기 엄마 이야기를 한다. 담담한 듯 하지만 듣고 보면 냉담한 얘기이다.
언니는 X가지(이 놈의 적합치 않은 단어! 귀찮소. 검열을 해제해 주오.)도 있고 고모에게도 과분한 딸이라 할만하다. 지금 자식이 여섯, 큰 애가 벌써 스물 셋, 막내 아들이 군대에 가서 혹시나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게 될까봐 서울 온 김에 청계 광장에 가서 촛불 집회에라도 참석해야겠다고 하는 언니이지만, 여섯 아이의 엄마이지만,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지만, 자기 엄마에 대한 유감은 세월과 함께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자란 것을, 그리고 현재의 고통을, 끝나지 않는 과거의 아픔을, 짧은 말로 나누었다. 과거는 과거, 부모들의 일은 부모들의 일,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고 싶어도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 일이구나. 나는 정말 이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릴 때는 사촌들을 소 닭 보듯 했다. 특히 나보다 어린 사촌들을. 어느 날 다 자라서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명절, 제사에도 모일 수 없게 된 어느 날 얘기를 나누었더니 이 아이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부모 밑에 자라서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몸은 더 멀어졌는데 마음은 어느 한 구석에서 아주 남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슬픈 과거는 공유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우리 부모는 죽기살기로 자식을 키웠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에 폭력 가장이었고 엄마는 불굴의 투지로 평생 맞서 싸워 주셨지만(-.-;;;) 어쨌든 자식을 위해 과거에도 참았고 오늘도 참고 있다. 그래도 자식은 부모 탓이 많다. ‘부모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자식들이 요 모양이잖아, (현재의 어려움을) 자업자득이려니 하십시오.’
고모는 죽기살기로 자기 인생을 살았다. 죽기살기로 자기자식을 키우지는 않았다. 우리 집안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모는 뭐고 자식은 또 뭘까?
고모에게는 과분하다 할 수 있는 자식인 언니이건만 그래도 언니는 마음 한 켠에 죽기살기로 자식을 보듬어 안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차가운 마음이 있다. 그래도 그 마음을 내놓고 얘기할 때는 아마도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됐기 때문이겠지. 계속해서 정리되고 있는 중인지도. 평생 쓰다듬어도 낫지 않을 상처인지도.
우리는 과거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자란 청소년기와 현재의 어려움, 결코 끝나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를 짧은 말로 이야기했다. 울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소리 높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낫지 않는 상처는 낫지 않는다. 그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용서… 오늘 하루를 눈물 없이 살아낸 것, 오늘 하루를 눈물로 보낸 것, 이렇게 지내는 하루하루가 용서가 될 것이고, 용기가 될 것이고, 중언부언 죽을 때까지 되씹고 곱씹으면서.
결혼식장에서는 즐거웠는데 막상 돌아와 한숨 쉬고 나니 씁쓸하다. 샘이 난다. 누구는 저렇게 결혼도 하고… 피곤해서 오른쪽 편도선이 아프다.
친척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날은 그저 외국에 이민이라도 가서 살았으면 싶다. 피곤하다. 다 안 만나고 쓸데 없는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거 이민 안 가면 못 하는 일인가? 다시 한 번 좋은 사람인 척하는 나에게 좌절한다… 어쩌면 좋을까… 다음 번에 다시 동생이나 사촌 동생이 혼인한다고 하면… 쩝…
도망도 치지 않고 오바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건가, 정말… 궁리 좀 해보자…
애가 여섯인 사촌 언니를 만났다. 일찍 혼인해서 애 셋은 이미 독립했고 지금은 셋 하고만 같이 산다고 한다. 언니와 형부는 태안에 살지만 어업을 하지는 않는다. 시골이라 과외를 시키려야 시킬 수도 없어 애 키우기는 좋다고 한다. 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언니의 엄마이자 나의 고모, 우리 엄마의 시누이이자 아빠의 누나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우리집에 맡기다시피 했다. 우리 엄마한테 조카들 도시락에는 꼭 계란 후라이를 넣으라고 가시 돋친 말은 했어도 손수 싸주지는 않았다. 고모는 여섯 남매의 맏이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받는 딸로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을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하고 싶은 대로. 고모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우리 아빠는 중졸이다. 고모는 중졸인 동생이 밤잠 못 자고 빵공장에서 노동하는 월급을 삼 년치나 당겨 받아서 그 돈으로 당시 잘 나가던 공사 졸업생, 장교와 결혼을 했다. 몇 년 전에 한 번 물어봤다.
“고모, 그때 왜 그랬어?”
“몰라, 그때는 왜 그랬는지. 고모는 그 돈이 그 돈인 줄 몰랐어.”
몰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이었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몰랐다고 한다. 수원에서 선경방직의 전신인지, 그 당시에도 선경방직이었는지 하는 회사를 다니던 고모였다. 장교와 결혼하겠다고 방직공장을 관두고 공군사관학교와 관련된 어딘가로 직장을 옮긴 고모였다.
사촌 언니는…
언니는 고모 이야기를 한다. 고모는 이태 전에 칠순을 넘겼다.
언니는 자기 엄마 이야기를 한다. 담담한 듯 하지만 듣고 보면 냉담한 얘기이다.
언니는 X가지(이 놈의 적합치 않은 단어! 귀찮소. 검열을 해제해 주오.)도 있고 고모에게도 과분한 딸이라 할만하다. 지금 자식이 여섯, 큰 애가 벌써 스물 셋, 막내 아들이 군대에 가서 혹시나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게 될까봐 서울 온 김에 청계 광장에 가서 촛불 집회에라도 참석해야겠다고 하는 언니이지만, 여섯 아이의 엄마이지만,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지만, 자기 엄마에 대한 유감은 세월과 함께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자란 것을, 그리고 현재의 고통을, 끝나지 않는 과거의 아픔을, 짧은 말로 나누었다. 과거는 과거, 부모들의 일은 부모들의 일,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고 싶어도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 일이구나. 나는 정말 이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릴 때는 사촌들을 소 닭 보듯 했다. 특히 나보다 어린 사촌들을. 어느 날 다 자라서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명절, 제사에도 모일 수 없게 된 어느 날 얘기를 나누었더니 이 아이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부모 밑에 자라서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몸은 더 멀어졌는데 마음은 어느 한 구석에서 아주 남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슬픈 과거는 공유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우리 부모는 죽기살기로 자식을 키웠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에 폭력 가장이었고 엄마는 불굴의 투지로 평생 맞서 싸워 주셨지만(-.-;;;) 어쨌든 자식을 위해 과거에도 참았고 오늘도 참고 있다. 그래도 자식은 부모 탓이 많다. ‘부모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자식들이 요 모양이잖아, (현재의 어려움을) 자업자득이려니 하십시오.’
고모는 죽기살기로 자기 인생을 살았다. 죽기살기로 자기자식을 키우지는 않았다. 우리 집안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모는 뭐고 자식은 또 뭘까?
고모에게는 과분하다 할 수 있는 자식인 언니이건만 그래도 언니는 마음 한 켠에 죽기살기로 자식을 보듬어 안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차가운 마음이 있다. 그래도 그 마음을 내놓고 얘기할 때는 아마도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됐기 때문이겠지. 계속해서 정리되고 있는 중인지도. 평생 쓰다듬어도 낫지 않을 상처인지도.
우리는 과거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자란 청소년기와 현재의 어려움, 결코 끝나지 않는 과거의 그림자를 짧은 말로 이야기했다. 울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소리 높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낫지 않는 상처는 낫지 않는다. 그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용서… 오늘 하루를 눈물 없이 살아낸 것, 오늘 하루를 눈물로 보낸 것, 이렇게 지내는 하루하루가 용서가 될 것이고, 용기가 될 것이고, 중언부언 죽을 때까지 되씹고 곱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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