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일 년

처음 중년 고양이와 데이트를 시작할 때
아는 선생님 말씀이,
"여자와 남자는 처음에는 서로 좋아서 살고
나중에는 정말 돈 때문에 살고
마지막에는 친구가 되어서 살아요."
"동성애자 커플 중에서 마지막까지 간 커플을 본 적이 없어요."
"뽀는 꼭 마지막 단계까지 살아 봐요."

중간에 이런 얘기도 있었다.
친구같기도 하고 동지같기도 한 배우자야말로
같이 낳아 길러 이제 성인이 된 자식 이야기를
아무런 신화 없이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
오랜 세월이 빚은 애착과 애증의 관계.
비바람과 햇빛에 깎고 깎여서 빛나는 백골만 남은.

서로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요즘에는 고양이와 만난지
일 년이 되어간다/꼭 일 년이 되었다/일 년쯤 됐다
고 소개를 한다.

한 동안은 고양이와 내가 한 자리에 있어도 필요한 일이 아니면
서로 사귄다거나 하는 식의 소개는 하지 않았다.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고백/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다가 관계를 '아우팅' 당한 적도 있다.

다른 면으로는 사람을 꼭 짝과 맺고 있는 관계로 정의하는,
저 사람이 싱글인지, 짝이 있는지 알아야 마음이 편한,
짝이 없는 사람을 보면 짝을 맺어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짝짓기 중심주의, 커플 중심주의가 싫어서 그러기도 했다.

그는 그, 나는 나인데 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는 그, 나는 나라는 건
도리어 우리 둘만 있을 때 통하는 말이고,
밖에 나서면 사귀고 있습니다, 일 년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지하게 된다.

아직 일 년.

십 년을 사귄 커플이 깨지는 것도 봤고,
몇 년씩 함께 살면서 동지적으로 오래오래 살 것처럼 보이던
30대 커플이 깨지는 것도 봤고,
닭살 득득 돋게 만들던 새내기 커플이 일이년 사이에 깨지는 것도 봤고.
수없이 봤고.

'정말 돈 때문에' 살 수도 없고
'자식 때문에' 살 수도 없고
'체면 때문에' 살 수도 없는
레즈비언 커플이 되어서
오랜 세월을 쌓는 것도 그리 믿을만한 밧줄-관계를 묶어주는 밧줄-
이 아닌 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 년이라는 게 아쉽고
어서어서 세월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우리 사이에 돈도 자식도 아닌 뭔가가 많이 쌓였으면 좋겠다.



일반
빠알간 뽀 1

댓글 1개

L & Kira님의 코멘트

L & Kira
서로를 위한 마음을 쌓고 싶은 거겠지요 끝에는 그동안 쌓였던 마음들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그것은 기억이 되어 두 분을 지켜주겠지요 일반인들은 흔히 과거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당신 때문에 시집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잘 나가던 내가 이팔청춘에 어쩌다 자식 낳고 이 신세가.., 내 옆에 있어줘서, 우리 아이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 등등 레즈비언 커플은 같은 동성이기에 일반인과는 다른 애틋함 이 있을거 같군요... 사랑에 반드시 창조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그것도 창조물이죠 그래서 저는 레즈비언 분들의 사랑을 영적인 것으로 보고 있구요. 세월이 흘러 일반인의 그것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여성 분들 삶에서의 배려와 인내.. 무한감성.. 오랜 시간 쌓았던 마음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