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또는 어른

작년 연말에 우리팀에 신입사원이 한 명 들어왔다.
나는 상장을 앞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
중소기업... 전에 다니던 회사도 중소기업이었지만 연혁, 학원 기반의 탄탄한 현금흐름, 오너의 3대 세습 등 지금 다니는 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는 걸 지금 다니는 회사를 다니면서 알게 됐다.

신입사원은 당차고 똑똑하지만 오랫동안 구직활동을 했고, 서비스업종에서 비정규직으로도 한참 일했고, 우리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3개월이 지나면 정직원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막상 입사하자마자 정직원 TO는 없다고 발뺌했다고 한다.

별다른 교육 없이 곧장 바쁜 현업에 투입된 신입사원은 그래도 당차고 똑똑하게 할 일을 해나갔다.
한 편으론 믿음직해서 미래의 팀장감이라고 내 맘대로 점찍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 드디어 빵 터졌다. 울음보가 빵!

어른스러운 그 직원은 힘든 척 하기 싫고 괴로운 척 하기 싫어서 계속 자기를 무리하게 굴렸던 거다.

오늘은 여러가지가 겹쳤다.

지난 3주간의 번갯불에 콩튀겨 먹기 프로젝트의 압박...
그동안 같이 일했던 디자이너는 내일로 퇴사...
디자이너에게 허드렛일만 시키는 1팀 팀장은 디자이너가 아닌 직원을 뽑겠다고 하니, 자기 옆구리에 끼고 지 입맛대로 휘두를 디자이너가 없으면 안 되니까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입에 게거품... (속 다 보임 흥!)
지난 3주간 번갯불에 콩튀기는 프로젝트를 시킨 장본인은 결과물 견본에 한 칼질이 맘에 안 든다고 지랄재랄... 니가 하시든가요!

신입사원은 유쾌발랄한 인상인데, 어제는 이사님이 술 마시고  '나 부드러운 남자야' 이러면서 자기 팔을 건드렸다고 겁까지 집어먹었다.

하이고... 우리 이사는 솔직히 부드러운 남자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산적 스타일인데,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사람이고 머리가 빨리 돌아가서 직원이 고달프기는 하나 그래도 무식하고 부지런한 상사보다는 백번 나은 사람이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해서 술이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지는데, 어제는 겁에 질린 신입 사원의 팔만 건드린 게 아니라 실은 내 팔도 건드렸다. 그럴 때도 나는 그 사람이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다고 느꼈다. 조심스러운 마음, 또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

직위는 이사님이시나 사실 나랑 4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동생이 나와 동갑이라는 말을 자주 하고, 나와 이사님이 같은 세대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생각해 보면 부드러운 남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신입사원 - 이제 입사 9개월의 위기를 겪고 있는 - 에게 부드러운 남자 운운할 때도 나는 좀 웃겨서, 그거 좀 위험한 발언이다, 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 사람에게 신뢰가 없다면 성희롱이라고 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맘이 편해서 그저 웃기기만 했다.

나도 남이 너무 가까이 오거나 날 만지는 걸 싫어하지만, 그 사람의 조심스러운 마음이 느껴질 때는 불쾌하지 않다. 서로 눈치를 본다는 건 그 사람이 직위를 이용해서 날 만질 의도는 없단 거다. 그리고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조직의 위계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 먹고 싶어한다는 거 아닐까. 잠시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지.

왜냐하면 나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선을 열심히 긋고 살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들은 내가 친구먹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안다.

이사님도 마찬가지다. 난 이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일을 배우려고 노력하지만, 거기까지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나는 잘 웃는 친절한 사람이지만 친구 사귀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는 늘 어려운 문제인데, 난 감정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흠...
다정다감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속은 차갑다고 해야 하나... 목석같다 해야 하나...

여튼 어제 구레나룻과 턱수염은 없으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고 살이 퉁퉁해서 나름 산적과 같은 위용이 있는 이사님은 술이 취해서 번들번들한 눈으로, 입에서는 침을 잔뜩 튀겨가면서, 신입사원의 팔을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난 부드러운 남자야'라고 했고, 우리 신입사원은 완전 겁 먹었다.

내 팔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돌이켜 봐도 붙잡은 적은 없는데, 손을 댔다, 뗐다 하면서 '친해지고 싶어요'라는 말로 해석되는 몸짓을 했다는 기억 뿐인데, 눈이 번들번들한 것을 보면서는 나도 '아 완전 취하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실은 그런 눈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술에 익숙한 집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그런 남자를 보면 어쩐지 '다정이 병인'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하지만 신입사원은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겹쳐서 그만 울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회사 앞 커피집에 가서 '괜찮다고 하지마' 그랬더니 한 번 더 빵 터진다.

너무 오랫동안 꿋꿋하게 버틴 탓인데, 남들이 유쾌발랄하게 보는 한은 괴로운 광대노릇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향후 일주일간 수시로 울라, 고개 숙이고 다니라, 우울한 얼굴로 돌아다녀라, 힘이 없을 때는 남이 뭘 물어봐도 대답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회사에서 우는 거 자존심 상하고 평판을 망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울어야 한다. 
과부하가 걸렸다면. 무리했다면.

사람들은 이상하다. '무거울 텐데, 무거울 텐데...' 하면서도 낙타가 버티는 한은 계속해서 짐을 올려 놓는다. 마지막 바늘 하나가 보태져서 마침내 쓰러질 때까지.
그럴 때는 버티면 안 된다. 허리나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내가 주저 앉아야 한다.

 


빠알간 뽀 2

댓글 2개

뽀 화이팅~님의 코멘트

뽀 화이팅~

뽀는 아직 버틸만 한것 같은데요~^^ 간만에 와서 뽀글 읽고 가서 좋아요. 요즘은 일상이 똑같은데 안똑같아요. 그게 참 설명이 이상한게... 그날 그날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비슷한 일상인데도 말이에요. 어제 어둔 밤길을 걷다가 알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더랬지요. 하지만 멀쩡해요. 잘 웃고 잘(?) 먹고... 근데 한편으론.... 다들 이정도의 파동은 갖고 있는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서도 잘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나면 묵직한 슬픈 기분이 나를 감싸고 있거든요. 하지만 나쁜건  아니에요. 그럴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첼로같은 아주 큰 악기를 들고 고요하고 부드럽게 현을 켜는 나를 보곤해요. 내가 날 잘 위로하니까 괜찮은거에요. 하아~ 뽀 글 읽고 필받아서 잠깐동안 감정토로하고 가네요.바이~

뽀님의 코멘트

'첼로 같은 큰 악기를 들고 고요하고 부드럽게 현을 켜는 자신을 본다'니...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멋지네요...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괴로움도 고요하고 부드럽게 켜는 게 삶일까... 쩝... 요요 신입사원이 또 아주 고집쟁이에요.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면 말을 안 들어요.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설득 못하면 똑같이 대해주려고 하는 면도 있고요. 에효... 나도 저랬나?? 이젠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니지, 나랑은 다른 사람이지... 뭐 이러면서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