팸과 부치들의 대행진

팸과 부치들의 대행진

메롱을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메롱의 어떤 면에 많이 관대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 사귈 때는 메롱이 남자 같은 느낌이 드는 짓을 하면 견디기 힘들었다. 트집잡아서 싸움도 많이 했다. 이번에는 좀 남자 같은 느낌을 줘도 그게 메롱이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개인적인 특성으로 접수하게 되었다. 괜찮았다. 왠지 내가 진화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심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도 했다.

전에는 팸, 부치를 나누는 것에 겉으로는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고 나누고 싶은 사람은 나누고 말고 싶은 사람은 말고, 하지만 나는 굳이 구분하지 않는 편이다, 라는 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듯한 태도를 취했다. 속으로는 팸, 부치를 나누는 것에 격렬한 거부를 느꼈다. 부치를 만날 바에야 그냥 남자를 만나지, 뭐하러 그러겠느냐, 하면서. 팸, 부치에 대한 거부감은 메롱이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들거나 메롱이 나를 어쩌다 레즈비언과 섹스하게 된 이성애자 취급을 할 때마다 더 심해졌다. 어쩌다 레즈비언과 섹스하게 된 이성애자라는 말이 맞을지 잘 모르겠다. 메롱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을까? 어쩌다 부치와 섹스하게 된 이성애자라는 말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쩌다 트랜스젠더와 섹스하게 된 이성애자라거나.

레즈비언 / 부치와 트랜스젠더의 차이는 내게는 그런 것이다. 여성으로 자신을 인식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페미니스트인가, 그렇지 않은가? 페미니즘에 공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메롱은 약자의 논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메롱을 다시 만나면서는 나 자신이 팸, 부치의 구분에 많이 관대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팸이고 메롱이 부치이면 어떤가? 사실 나도 오랫동안 명예 남성이었고 메롱과 나 중에 누가 더 남자 같은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자로 재듯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남성성에 관대해졌기 때문일까? 여하튼 나는 전보다 유연해졌고 별로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메롱의 친구들과 어울릴 일이 자꾸 생기면서 새로운 혼란이 생겼다. 메롱이 어울리는 친구들과 그들의 짝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나는 확연한 이분법을 보게 된다. 한쪽은 부치들이고 한쪽은 팸들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또 다른 의심이 고개를 든다. ‘정말 확연한 이분법이라고 생각하나?’ 이를테면 메롱이 어울리는 친구 중에도 여성스럽게 생기고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메롱의 친구들, 즉 부치들만 죽 세워놓고 본다면 그 사람은 개중 여성스럽고 팸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생긴 사람의 짝은 극단적으로 여성스럽게 생겼다. 훨씬 더 여성스럽게 생긴 것이다.

이런 일이 고민이 된다는 자체가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내 마음 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걸까? 나는 메롱의 무엇이 맘에 들지 않아서 또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걸까? 다들 함께 모인 자라의 그림은 확실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건가, 나는? 메롱과 둘이 있으면서 메롱의 모습이나 나의 모습에는 관대하기 쉽지만 그렇게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뭔가 나는 이것 이상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것 같다… 내가 여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한가???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어떻게 보이든, 결국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팸들과 부치들의 대행진에 너무 불만스러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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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