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12
토요일.
오후 늦게 일어나 뉘엇뉘엇 지는 해를 받으며 청소를 한다. 저녁에는 어학연수를 떠난다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 강남은 먼 길이다. 언제 나가서 언제 들어오나, 한숨을 쉬다가도 약속 시간이 저녁 때라는 것에 조금 안도하고 다시 청소를 계속한다. 느릿느릿. 방이 좁아서 한 번에 치우고 한 번에 청소기로 밀고 한 번에 먼지를 닦고 할 수가 없다. 조금씩 이쪽 구석에 있는 것을 저쪽 구석으로 밀고 치우고, 다시 저쪽 구석에 있는 것을 이쪽 구석으로 밀고 치우고 이런 식이다. 아니면… 성격 때문인가… 나는 그냥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이 좋다. 세탁기도 느릿느릿 돌아간다. 일반 세탁이 아니라 란제리 세탁이라 그렇다… ㅋㅋ 세탁기도 느리게 돌아가다니…
메롱은 지금 일하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옛날 친구, 그 친구 얘기를 오랫동안 안 했나? 내가 정한 별명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였을까… 속썩임이…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사고 방식, 또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 이런 것을 인지하는 방식의 차이가 참말과 거짓말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다 늙어서 나의 가슴을 쪼갠(heart- breaking) 친구다. 아마 마지막으로 내 가슴을 쪼갠 ‘친구’일 것 같다…
나이가 어릴수록 친구 일로 가슴이 쪼개지는 일이 많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슴이 쪼개지더라도 예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다. 이제는 ‘너의 일’과 ‘나의 일’이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 일로 혼자 울며 가슴을 쓸어 내릴 일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다른 친구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부부 사이가 위태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혼을 할 정도는 아닌 줄 알았는데, 막상 이혼을 할 때는 저들끼리 싹 해치워버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알게 되었다… 이제는 가슴이 쪼개지지 않고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어째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우리가 어릴 때는 부모 세대에 대해서 말하고 엄마의 시집살이를 말하고 고모, 삼촌을 욕하고 그러면 그만이었다. 우리끼리 모여 앉아서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하면서 조그만 가슴들을 쓸어 내리곤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일이 되어버렸다. 결혼, 이혼, 아이, 친척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 먹고 사는 일에 치이고 늘 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우리 일이 되어버렸고, 집을 보러 다니는 일도 이사를 하는 일도 모두 우리 일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 깨지고 치이고 농땡이를 치는 것도 우리 일이 되었고, ‘재수 없는 직장 상사 얘기’를 하는 것이나 ‘아줌마 되는 게 뭐가 대수’인가 하는 것까지…
어제 만난 친구는 독신주의자다. 좀 더 길게 말하자면 레즈비언 독신주의자다. 늙어서 5-60대가 되면 한 동네, 걸어갈 수 있는 곳에 모여 살자는 얘길 했다.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메롱과 한 집에 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다시 만나기 시작한지 일곱 달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기대하고 그렇게 앞으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의문부호를 찍는다. 언제나 반쯤은 독신 여자인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는 거겠지.
그래도 오늘처럼 메롱이 일을 하는 토요일도 좋다. 회사 일도 없고 낮에 다른 볼 일도 없는 채로 혼자 조용히 느릿느릿 움직일 수 있어서 좋다.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그냥 내 리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청소하고 빨래하다 말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로 컴 앞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릴 수 있는 시간이. 하던 일 마저 하고 다른 일을 하라고 나를 조아재치는 엄마도 없고 메롱도 없는 시간이. 내 리듬대로 살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 엄마의 리듬이나 다른 가족의 리듬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고 살고 싶어서, 그 바람이 너무 간절하게 됐을 때 집을 나왔다.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필요하다. 가족은 필요하다.
어제 만난 친구와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좋았다. 이런 단편적인 말보다 뭔가 좀더 좋은 말로 형용해야 하는데… 푸훗! 사람들의 이름과 온갖 명사가 생각이 나지 않는 병이 도졌다. 남녀 배우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이 증상이 요즘 갑자기 너무 심해졌다. 명사가 생각이 안 나면 도대체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거시기, 거시기만 반복하다가 말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어쨌든 이 경우에는 영화의 주인공이란 말로 대신하자. 여자 주인공에게 많이 공감했다. 남자가 여자를 묘사하는 말이 있다. ‘말을 잘 하지만 교양은 없어요. 어휘력도 많이 딸리고. 언젠가는 도서관을 도서방이라고 해서 창피했던 적도 있었어요. 언제나 섹스할 수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해요… 기타 등등’ 경박하고 못 배운 여자라는 얘기 같은데… 나는 교양(매너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문제일 때)도 있고 어휘력도 딸리지 않고 언제나 섹스할 수 있어요, 라는 암시를 주고 싶어도 그럴 자신이 없지만(그렇다, 나에게 그런 것은 자신감의 문제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여전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답답하다. 남자는 코미디 배우이고 여자는 ‘타이타닉’에 나온 그 여자다.) 케이트 윈슬렛인가, 여자 배우 이름이? 맞는 것 같은데도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걸까, 나의 증상이 심각한 수준인가? 의심스럽다… 여튼 그 남자와 그 여자의 관계에서,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의 관계에서 뭔가 덜 배우고 덜 지적이고 좀 더 충동적이고 사려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둘 중의 한 사람은 늘 그런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런데 상대방은, 더 지적이고 더 돈도 많고 더 교양도 있고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싸우기도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경박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바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런 식이다. 지루하고 밍숭밍숭한 일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주고 나를 구원해줄 ‘그녀’를 기대하지만 막상 ‘그녀’가 몰고 오는 새로운 바람은 두렵다, 는 것인가? 지루한 일상이 파괴될 지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두려움, 공포를 주는 모양이다.
빨래 한 판이 다 돌아 갔다. 그만 써야겠다. 그만 쓰고 다시 청소하고 빨래 널어야지…
토요일.
오후 늦게 일어나 뉘엇뉘엇 지는 해를 받으며 청소를 한다. 저녁에는 어학연수를 떠난다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 강남은 먼 길이다. 언제 나가서 언제 들어오나, 한숨을 쉬다가도 약속 시간이 저녁 때라는 것에 조금 안도하고 다시 청소를 계속한다. 느릿느릿. 방이 좁아서 한 번에 치우고 한 번에 청소기로 밀고 한 번에 먼지를 닦고 할 수가 없다. 조금씩 이쪽 구석에 있는 것을 저쪽 구석으로 밀고 치우고, 다시 저쪽 구석에 있는 것을 이쪽 구석으로 밀고 치우고 이런 식이다. 아니면… 성격 때문인가… 나는 그냥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이 좋다. 세탁기도 느릿느릿 돌아간다. 일반 세탁이 아니라 란제리 세탁이라 그렇다… ㅋㅋ 세탁기도 느리게 돌아가다니…
메롱은 지금 일하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옛날 친구, 그 친구 얘기를 오랫동안 안 했나? 내가 정한 별명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였을까… 속썩임이…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사고 방식, 또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 이런 것을 인지하는 방식의 차이가 참말과 거짓말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다 늙어서 나의 가슴을 쪼갠(heart- breaking) 친구다. 아마 마지막으로 내 가슴을 쪼갠 ‘친구’일 것 같다…
나이가 어릴수록 친구 일로 가슴이 쪼개지는 일이 많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슴이 쪼개지더라도 예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다. 이제는 ‘너의 일’과 ‘나의 일’이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 일로 혼자 울며 가슴을 쓸어 내릴 일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다른 친구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부부 사이가 위태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혼을 할 정도는 아닌 줄 알았는데, 막상 이혼을 할 때는 저들끼리 싹 해치워버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알게 되었다… 이제는 가슴이 쪼개지지 않고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어째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우리가 어릴 때는 부모 세대에 대해서 말하고 엄마의 시집살이를 말하고 고모, 삼촌을 욕하고 그러면 그만이었다. 우리끼리 모여 앉아서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하면서 조그만 가슴들을 쓸어 내리곤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일이 되어버렸다. 결혼, 이혼, 아이, 친척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 먹고 사는 일에 치이고 늘 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우리 일이 되어버렸고, 집을 보러 다니는 일도 이사를 하는 일도 모두 우리 일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 깨지고 치이고 농땡이를 치는 것도 우리 일이 되었고, ‘재수 없는 직장 상사 얘기’를 하는 것이나 ‘아줌마 되는 게 뭐가 대수’인가 하는 것까지…
어제 만난 친구는 독신주의자다. 좀 더 길게 말하자면 레즈비언 독신주의자다. 늙어서 5-60대가 되면 한 동네, 걸어갈 수 있는 곳에 모여 살자는 얘길 했다.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메롱과 한 집에 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다시 만나기 시작한지 일곱 달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기대하고 그렇게 앞으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의문부호를 찍는다. 언제나 반쯤은 독신 여자인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는 거겠지.
그래도 오늘처럼 메롱이 일을 하는 토요일도 좋다. 회사 일도 없고 낮에 다른 볼 일도 없는 채로 혼자 조용히 느릿느릿 움직일 수 있어서 좋다.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그냥 내 리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청소하고 빨래하다 말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로 컴 앞에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릴 수 있는 시간이. 하던 일 마저 하고 다른 일을 하라고 나를 조아재치는 엄마도 없고 메롱도 없는 시간이. 내 리듬대로 살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 엄마의 리듬이나 다른 가족의 리듬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움직이고 싶고 살고 싶어서, 그 바람이 너무 간절하게 됐을 때 집을 나왔다.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필요하다. 가족은 필요하다.
어제 만난 친구와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좋았다. 이런 단편적인 말보다 뭔가 좀더 좋은 말로 형용해야 하는데… 푸훗! 사람들의 이름과 온갖 명사가 생각이 나지 않는 병이 도졌다. 남녀 배우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이 증상이 요즘 갑자기 너무 심해졌다. 명사가 생각이 안 나면 도대체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거시기, 거시기만 반복하다가 말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어쨌든 이 경우에는 영화의 주인공이란 말로 대신하자. 여자 주인공에게 많이 공감했다. 남자가 여자를 묘사하는 말이 있다. ‘말을 잘 하지만 교양은 없어요. 어휘력도 많이 딸리고. 언젠가는 도서관을 도서방이라고 해서 창피했던 적도 있었어요. 언제나 섹스할 수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해요… 기타 등등’ 경박하고 못 배운 여자라는 얘기 같은데… 나는 교양(매너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문제일 때)도 있고 어휘력도 딸리지 않고 언제나 섹스할 수 있어요, 라는 암시를 주고 싶어도 그럴 자신이 없지만(그렇다, 나에게 그런 것은 자신감의 문제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여전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답답하다. 남자는 코미디 배우이고 여자는 ‘타이타닉’에 나온 그 여자다.) 케이트 윈슬렛인가, 여자 배우 이름이? 맞는 것 같은데도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걸까, 나의 증상이 심각한 수준인가? 의심스럽다… 여튼 그 남자와 그 여자의 관계에서,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의 관계에서 뭔가 덜 배우고 덜 지적이고 좀 더 충동적이고 사려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둘 중의 한 사람은 늘 그런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런데 상대방은, 더 지적이고 더 돈도 많고 더 교양도 있고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싸우기도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경박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바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런 식이다. 지루하고 밍숭밍숭한 일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주고 나를 구원해줄 ‘그녀’를 기대하지만 막상 ‘그녀’가 몰고 오는 새로운 바람은 두렵다, 는 것인가? 지루한 일상이 파괴될 지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두려움, 공포를 주는 모양이다.
빨래 한 판이 다 돌아 갔다. 그만 써야겠다. 그만 쓰고 다시 청소하고 빨래 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