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결혼식—나의 하늘색 친구
내달에 결혼하는 친구는 학교 동창이 아니다. 사람들이 우리보고 어디서 알았냐고 물으면 우리는 여성 단체 아니면 ‘으쌰으쌰’ 운동판에서 알았다고 한다. 이쯤 얘기하면 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끼리에서 만났다. 내가 처음 끼리에 들어갔을 때 하늘색 친구는 끼리의 운영위원이었나? 여튼 한자리 하고 있었다. 파트너도 있었고 꽤 든든해 보이는 사이였다. 그 때가 1998년 겨울이었다. 둘이 깨진 건 2001년이었다. 2001년에 난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구가하면서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점심 때도 반주를 하지 않으면 일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술기운으로 일을 했다. 지금 얘기하면 너무 심한 것 같다. 하지만 인생에는 극단적인 시기가 연달아 오기도 한다. 열 달을 채워서 그 때까지 내가 월급 받고 다닌 중에 제일 길게 다녔다는 기록을 세우고 한 여름에 회사를 때려치고, 작파하고, 경비를 몽땅 빌려서 유럽 알프스를 열흘 동안 돌고 왔다. 내가 안 돌고 기차가 돌았다. 알프스의 산악 기차는 높이도 올라갔다. 그 때 우리나라를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마음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나는 열 달간 머물렀던 땅을 떠나 마음의 고향, 하늘도 다시 날아올라간 것이다. 2001년이면 내가 대학을 입학한지 11년째가 되는 해다. 그 때까지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인간을 웃어주자. 지나간 일이니 웃어줄 수 있다. 열흘 간의 비현실적인 ‘경비를 몽땅 빌려서 떠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족히 10년은 된 친구 커플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하늘색 친구는 연락이 안 됐다. 소문만 떠돌았다. 커뮤니티의 그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을이 되어갈 때쯤에 하늘색 친구와 함께 살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파란색 친구라고 하자. (여기서는 유쾌하게 웃어주자.) 파란색 친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둘이 헤어졌다는 걸 알았다. 파란색 친구가 바람이 났다고 했다. 나는 너무 지쳐서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내 반응이 덤덤해서 파란색 친구는 적잖이 실망한 모습이었다.
2006-05-15
메롱과 마지막으로 싸운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르고 있는 중이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너무 짧게 잘라서 후회를 많이 했다. 한달 보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사람꼴이 돌아온다 싶다. 아직도 새로 자른듯 짧은 머리지만.
하늘색 친구와 파란색 친구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친구들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드디어 친구들과 나 사이에 분리가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은 친구들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오지랖을 펼치고 기를 쓰고 애를 태우고 마음을 끓일 기운이 없어져 버렸다. 친구들은 그 때부터 나에게 남이 되었다. 여전히 가까운 친구들은 가깝지만 어쨌든 내남의 구분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하늘색 친구는 지난 달에 결혼했다. 이성애 혼인을 했다. 나는 생애 세 번째 가방순이의 역사적 사명에 짓눌려 대략 일찍 신부화장을 하는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웬걸? 가방순이는 이미 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후에도 두 명이나 더 왔다. 어휴~~ ‘왜 이렇게 많이 불렀어?’ 했더니 ‘처음 해보는 거라 불안해서…’라고 했다.
처음… 이미 파란색 친구와 살았던 생활이 결혼 생활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다름이 있었다는 거지. 법과 제도의 보호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커플들은, 말하자면 메롱과 나 사이처럼 ‘우리도 뭐 다를 것 없어, 사실혼 관계야’ 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다른 커플들이 서로 ‘여보’라고 부를 때 내 마음이 먹먹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능한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는 커플들’인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했다. ‘법과 제도’에 목마르다기 보다는 법과 제도가 보호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견고함’에 목말랐기 때문 아닐까?
파란색 친구가 집을 나갔을 때 하늘색 친구가 가장 좌절했던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자신을 돌아보며 헤어짐을 후회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미련도 없는데 왜 이렇게 우울한가를 물어보면 역시 그 대답이 돌아온다. 가족은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어내는 게 아닌데, 한 번 잡아맨 마음을 찢어야 하니 모양이 처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올 리가 없다.
잔인하지만 남의 얘기를 하겠다.
(역시 남의 얘기를 한다는 건 잔인해서 삭제했다.)
남의 얘기, 소문을 다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성애 혼인을 깰 때는 어쨌든 희생이 따른다. 하다못해 남들의 뒷말이라도 한 소리 더 듣게 된다. 내가 들은 말도 결국 소문이며, 이 책의 저자가 겪은 일은 훨씬 더 심해서 스캔들 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못 팔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수필집에 다 써놓은 이야기이다. 재혼에 얽힌 스캔들 때문에 겪은 고초가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한 때 공감하며 읽은 얘기들이 돌이켜 보니 자기 방어용, 또는 항변용 글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가 막혔다. 아닐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읽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파란색 친구가 마음이 들떠서 한방에 집을 나갔을 때 그가 겪은 사회적 불이익이라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팔팔 뛰지 않아서 실망을 느낄 정도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자신도 마음 고생은 심했다지만 그것이 관계를 깨뜨린 사람에게 무슨 변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싸우고 아무리 힘들고 괴로왔고 아무리 원망하고 아무리 아팠어도 한 번 묶은 마음을 잡아떼는 일이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아는 사람만 알지 심지어 가족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그 아픈 마음을 펼쳐보일 수도 없다.
내가 잃은 것은 사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관계에 묶었던 마음, 관계 자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헤어짐은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내달에 결혼하는 친구는 학교 동창이 아니다. 사람들이 우리보고 어디서 알았냐고 물으면 우리는 여성 단체 아니면 ‘으쌰으쌰’ 운동판에서 알았다고 한다. 이쯤 얘기하면 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끼리에서 만났다. 내가 처음 끼리에 들어갔을 때 하늘색 친구는 끼리의 운영위원이었나? 여튼 한자리 하고 있었다. 파트너도 있었고 꽤 든든해 보이는 사이였다. 그 때가 1998년 겨울이었다. 둘이 깨진 건 2001년이었다. 2001년에 난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구가하면서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점심 때도 반주를 하지 않으면 일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술기운으로 일을 했다. 지금 얘기하면 너무 심한 것 같다. 하지만 인생에는 극단적인 시기가 연달아 오기도 한다. 열 달을 채워서 그 때까지 내가 월급 받고 다닌 중에 제일 길게 다녔다는 기록을 세우고 한 여름에 회사를 때려치고, 작파하고, 경비를 몽땅 빌려서 유럽 알프스를 열흘 동안 돌고 왔다. 내가 안 돌고 기차가 돌았다. 알프스의 산악 기차는 높이도 올라갔다. 그 때 우리나라를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마음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나는 열 달간 머물렀던 땅을 떠나 마음의 고향, 하늘도 다시 날아올라간 것이다. 2001년이면 내가 대학을 입학한지 11년째가 되는 해다. 그 때까지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인간을 웃어주자. 지나간 일이니 웃어줄 수 있다. 열흘 간의 비현실적인 ‘경비를 몽땅 빌려서 떠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족히 10년은 된 친구 커플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하늘색 친구는 연락이 안 됐다. 소문만 떠돌았다. 커뮤니티의 그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을이 되어갈 때쯤에 하늘색 친구와 함께 살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파란색 친구라고 하자. (여기서는 유쾌하게 웃어주자.) 파란색 친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둘이 헤어졌다는 걸 알았다. 파란색 친구가 바람이 났다고 했다. 나는 너무 지쳐서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내 반응이 덤덤해서 파란색 친구는 적잖이 실망한 모습이었다.
2006-05-15
메롱과 마지막으로 싸운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르고 있는 중이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너무 짧게 잘라서 후회를 많이 했다. 한달 보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사람꼴이 돌아온다 싶다. 아직도 새로 자른듯 짧은 머리지만.
하늘색 친구와 파란색 친구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친구들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드디어 친구들과 나 사이에 분리가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은 친구들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오지랖을 펼치고 기를 쓰고 애를 태우고 마음을 끓일 기운이 없어져 버렸다. 친구들은 그 때부터 나에게 남이 되었다. 여전히 가까운 친구들은 가깝지만 어쨌든 내남의 구분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하늘색 친구는 지난 달에 결혼했다. 이성애 혼인을 했다. 나는 생애 세 번째 가방순이의 역사적 사명에 짓눌려 대략 일찍 신부화장을 하는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웬걸? 가방순이는 이미 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후에도 두 명이나 더 왔다. 어휴~~ ‘왜 이렇게 많이 불렀어?’ 했더니 ‘처음 해보는 거라 불안해서…’라고 했다.
처음… 이미 파란색 친구와 살았던 생활이 결혼 생활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다름이 있었다는 거지. 법과 제도의 보호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커플들은, 말하자면 메롱과 나 사이처럼 ‘우리도 뭐 다를 것 없어, 사실혼 관계야’ 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다른 커플들이 서로 ‘여보’라고 부를 때 내 마음이 먹먹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능한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는 커플들’인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했다. ‘법과 제도’에 목마르다기 보다는 법과 제도가 보호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견고함’에 목말랐기 때문 아닐까?
파란색 친구가 집을 나갔을 때 하늘색 친구가 가장 좌절했던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자신을 돌아보며 헤어짐을 후회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미련도 없는데 왜 이렇게 우울한가를 물어보면 역시 그 대답이 돌아온다. 가족은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어내는 게 아닌데, 한 번 잡아맨 마음을 찢어야 하니 모양이 처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올 리가 없다.
잔인하지만 남의 얘기를 하겠다.
(역시 남의 얘기를 한다는 건 잔인해서 삭제했다.)
남의 얘기, 소문을 다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성애 혼인을 깰 때는 어쨌든 희생이 따른다. 하다못해 남들의 뒷말이라도 한 소리 더 듣게 된다. 내가 들은 말도 결국 소문이며, 이 책의 저자가 겪은 일은 훨씬 더 심해서 스캔들 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못 팔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수필집에 다 써놓은 이야기이다. 재혼에 얽힌 스캔들 때문에 겪은 고초가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한 때 공감하며 읽은 얘기들이 돌이켜 보니 자기 방어용, 또는 항변용 글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가 막혔다. 아닐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읽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파란색 친구가 마음이 들떠서 한방에 집을 나갔을 때 그가 겪은 사회적 불이익이라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팔팔 뛰지 않아서 실망을 느낄 정도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자신도 마음 고생은 심했다지만 그것이 관계를 깨뜨린 사람에게 무슨 변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싸우고 아무리 힘들고 괴로왔고 아무리 원망하고 아무리 아팠어도 한 번 묶은 마음을 잡아떼는 일이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아는 사람만 알지 심지어 가족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그 아픈 마음을 펼쳐보일 수도 없다.
내가 잃은 것은 사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관계에 묶었던 마음, 관계 자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헤어짐은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