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2006-08-11
오랜만에 저녁에 회식을 했다. 소주도 반 병쯤 마셨다. 고깃집에서 식사는 마쳤는데 얘기가 자꾸만 길어졌다. 아, 포도주 한 병 시켜서 마시면 딱 좋겠구만… 팀장이 새로 와서 밥을 사는 자리인데 내 맘대로 포도주를 시키기도 그렇고, 내가 사도 상관은 없지만 되바라져 보일까 싶어서 관뒀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앉아 있으려니 바늘 방석이군…

별로 이차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원래 그렇다. 저녁 회식도 일년에 한 번 할까말까인데 웬 이차람!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지 않고 미적대는 바람에 내가 싫어해서 이차를 못 간다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건 아니잖아~! 난 아까부터 목이 말랐다구! 그래서 목도 축일 겸 이차를 갔다. 일식주점에서 간단히 생맥주를. 팀장이 자꾸 먹고 싶다는 식으로 나오길래, 에라~! 소주도 한 병 더 시켰다. 예의상 반 잔은 같이 마셔주고, 아, 더 이상은 무리데쓰! 생맥주 500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파인애플이 이 사이에 너무 껴서 우아하지 못하게 앉은 자리에서 이쑤시개를 써버렸다.

늦은 밤, 광화문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이차까지 하니 꽤 늦어버렸다. 아휴~ 낼도 출근해야 하는데, 귀찮아! 늦게 집에 가서 늦게 씻고 늦게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또 출근하고, 아유, 정말 다 귀찮아! 먹고 놀 땐 좋지만 그것도 체력이 허락할 때나 좋았지. 갑자기 같이 걸어가던 몇 살 어린, 지금 스물일곱인가 여섯이라니까 몇 살이 어린 게 아니라 꽤 어린 거구나, 하지만 분위기가 나름 노숙해서 그렇게 어린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꽤 어린 소릴 하긴 하지만. 그래서 나보다 일고여덟 살쯤 어린 직원이 갑자기 내 팔을 툭툭 치면서 십여 미터쯤 앞서 걸어가는 두 남자를 가리킨다. 보세요, 보세요, 게이인가봐, 저 사람들, 으, 싫어~!
게인 줄 어떻게 알아?
걸어가면서 자꾸만 서로 손을 스치잖아요? 남자들은 저렇게 가깝게 안 걸어가.
(정말? 나는 툭하면 종로 거리에서 얼싸하게 취해서 서로 껴안고 택시 잡아주고 하는 아저씨들, 진짜진짜 아저씨들 보면서 ‘혹시…?’하는 상상을 하기 일쑨데? ㅋㅋ)
그래? 그쪽은 게이두 아니면서 게이다가 팍팍 돌아가나봐?
(나 술 취했다. 어찌 대담하게 이런 말까지 했을꼬…? 쩝)
(왜 그쪽더러 게이두 아니라구 했냐면 그 여자가 저녁 내내 한 얘기가 남자 만나 결혼하는 얘기였거든. 뭐, 그런 얘기 백날 한다구 그 사람이 게이가 아니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어, 게이다 알아요? 뽀 씨는 좀 아나봐?
그래, 좀 알어. 그나저나 게이면 어때? 싫을 거까진 뭐 있어?
아니, 뭐, 저두 괜찮아요. 상관 없어요, 그런 거. 하지만 애정 표현하는 거는 싫어.
아니, 뭐 저 정도를 가지고 애정표현이라는 거야? 손을 잡고 걷는 것두 아닌데. 너무 심한 거 아냐?
어떤 사람이 게이라는 거는 괜찮은데 막상 애정표현 하는 걸 보면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가치관, 내가 카톨릭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랑 막 부딪쳐요.
(카톨릭? 야훼가 십계명을 주심서 그랬지. ‘니 이웃을 사랑하라’고.)
어떤 사람이 게이인 건 괜찮은데 애정표현은 싫다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동생이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는데 내 동생님이 말씀하시길 ‘애정표현의 수위가 높아서 동성애에 동조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릴 수 있다. 나는 그 점이 몹시 안타깝다.’ 그러시더구만. ‘왕의 남자’같은 낭만을 원한다는 거지, 한 마디로. 근데 그거 좀 우끼잖아? 물론 성이 전부 다는 아니지만 또 얼마나 중요한 거야? 단적으로 중요한 거잖아. 그거 빼놓고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는 좀 웃기지 않어?
어어~ 뽀씨, 말 잘 한다. 우리 그거 나중에 또 얘기해요.

바이바이~~
나보다 예닐곱 살 어린 그녀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몇 년 전에 여자들만 있는 동아리 모임에서 술 마시고 꾸벅꾸벅 졸고 앉았다가 실수한 일이 생각났다. 난 정말 고개 숙이고 졸고 있었는데, 대화는 뭐, 늘 그렇듯이 남녀상열지사 쪽으로 흘러갔겠지. 그리고 누군가 무슨 소릴 했는데 내가 갑자기 고개를 팍 쳐들고 말했다. “아니, 뭐 그 사람이 꼭 남자라는 법이 어딨어?” 뭐 대충 그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잘 나는 건 아니다. 다만 이성애자 여자들의 집단상담 같던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는, 한 마디로 이야기의 맥을 이상한 데서 끊어버리는 소릴 한 것이다. 갑자기 눈이 말똥말똥하게 떠지고 술에 쩔었던 뇌에 불이 반짝반짝 들어왔다. 하지만 (늘 하는 소리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그걸 무슨 수로 수습한단 말인가. 나는 바로 돌아누워서 술김인양 잠들어 버렸다.

오늘도 난 실수한 걸까? 뭐, 오랜만에 소주를 마셔서 맘이 좀 풀어진 면도 없지 않지만 나는 나름대로 나 자신을 표현했다. 게이다가 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고, 밥 먹는 내내 남자 얘기와 결혼 얘기만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이 나의 게이다를 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 사람들에게 숨기는 일이 쉽지 않다. 나는 허벌 연애를 하고 있어도 한 마디도 못하고 남들의 시시껄렁한 연애 얘기는 감탄하면서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연애가 쫑나 가슴이 아파도 역시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꼭 연애가 아니어도 나는 나인데 나의 어떤 부분은 늘 그늘 속에 있다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의 얘기를 남들 얘기처럼 한다는 것이. 남들 얘기처럼 듣는다는 것이. 내가 이성애자인 척하면서 ‘나랑 살 남자는 무조건 말을 잘 들어야 돼요’라고 했을 때 나를 빤히 보며 ‘나 말 잘 들을 자신 있는데 나는 어때?’라고 하는 서너 살 많은 여자, 직장 상사, 독신에게 대거리를 해줘야 할 때. 아, 정말 싫어. 도대체 그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나를 떠보나? 하지만 그 여자는 날 떠볼 만큼 가깝지도 않은데. 내가 메롱과 어울리는 걸 어디선가 봤나? 나를 좋아하나? 하지만 그 여자는 전혀 게이다에 걸리지도 않는다구. 나에겐 매력이 없기 때문에 게이다 자체도 돌지 않는 건지… 어쨌든. 그 여자의 그런 질문은 정말 난처하다. 여러 사람과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본다는 것이. 자기자신은 골수 일반처럼 보임서!

여튼 나는 좀 지쳤다. 살짝 지쳐가고 있다.
정말로 그 여자, 독신, 상사가 이반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어떻해? 전혀 매력이 없는 걸. 예쁘게 생겼지만 내 취향은 아닌 걸.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