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기다림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그 전 일년도. 그 전 일년 동안 우리는 매일 연락하고 하루가 멀다고 만나고 뜨겁게 섹스했다. 지난 일년 동안 나는 그 사랑이 없이도 살아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라는 식으로 정리되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건 연애였어. 미래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지금 살고 있는 원룸으로 이사할 때 전세금 몇 백이 모자라서 월세를 꼈다. 몇 만원 안 되지만 은행 대출 이자랑 비교하면 훨씬 높다. 2년 전에 다시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마이너스 통장 대출로 모자란 전세금을 채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어떻게든 주거 형태가 바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 상태로 일년이 지나갔고 그녀에게 집을 나올 마음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안 건 언제쯤이었을까? 그녀의 나쁜 버릇: 솔직하지 않다. 내가 너무 원하는 것을 알면 마치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한다. 미룬다. 애매하게 넘어간다.

하긴 내가 들들 볶으니까 그저 볶이기 싫어서 그 자리만 면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그렇게 자기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식이다. 그녀에게 집을 나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나는 그녀를 덜 사랑했을 것이다. 십대가 아니라 삼십대에 사랑을 하면 그렇게 된다. 생활의 조건이 중요해진다.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살 마음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안다면 사랑도 식고 김이 빠질 것이다.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같이 살 마음이었는데 하도 볶여서 마음이 변했다든가, 뭐 그러다 결국 헤어졌으니 잘 된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그쪽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남녀 사이를 코치한 책을 보면 이런 얘기가 흔히 나온다. 잠자리에서는 뜨거운 말을 속삭이지만 사실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남자를 만나는 동안 자신의 삶의 조건을 그 남자에게 맞추고 관계에 맞추고 그러다가 혼자 바보가 되어버리는 여자 이야기. 여자가 잃는 것: 돈, 직장, 경력, 가족, 친한 친구, 익숙한 동네, 학업, 자기 자신을 위한 미래… 이번이 처음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삶의 계획보다 관계를 앞세우지 말라.’ 하지만 어떻게? 막상 관계에 빠져들면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은데, 그녀와 모든 것을 ‘조만간’ 함께 하게 되리라 믿게 되는데, 그녀도 그걸 원한다고 말하는데… 컹컹!!

하지만 어쨌든, 그 모든 유감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즘 지나간 일년과 그 전에 지나간 일년을 돌이켜 보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은 인생 무상이다. 삶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가슴 뿌듯했던 사랑도, 그 사람과 함께 꿈꾸었던(또는 함께 꿈꾼다고 착각했던) 미래도, 다른 사람과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섹스도, 그 무엇도 없이 지내온 지난 일년 동안 나는 죽지도 않았고 살이 빠지지도 않았고 절망과 좌절이 나를 집어삼키지도 않았고, 아니면 삼켰다가 다시 뱉었는지, 아무튼. 난 잘 살고 있다. 새로운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마음이 급할 것도 없다. 너와 내가 인연인지 아닌지 한 번 두고 보자, 이런 심정으로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급하게 닥쳐오는 일을 한다. 너와 함께 있으면 조금 더 행복할 것 같지만 네가 없어도 나는 다른 행복을 잘 찾아내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와 가끔 만나서 밥 사달라, 놀아달라, 들이대며 계속 친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 한 번 두고 보자고. 앞으로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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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3

댓글 3개

빠알간 뽀님의 코멘트

빠알간 뽀
내가 좀 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 자랐나?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 않기 때문에 사랑에 목숨 걸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거, 이거 하나도 안 서글픈데? 정말 좋은데. ^__________^ 오, 대가는 정말 비쌌어...

취옹님의 코멘트

취옹
저도 동참합니다! 전아직 그 깨달음까지도 미치지 못했지만..(님처럼 최소한 1년은 지나야겠지요)

sj님의 코멘트

sj
안녕하세요..배신의 상처를 달래보려구 이곳에 첨 들어와봤는데 당신의 글에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나름대로 위안을 삼네요..그사람을 마음에서 지워내기가 쉽지가 않아요.. 힘내세요 언젠가는 좋은 칭구가 나타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서 이쁜맘 갗구 살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