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나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완전 잠적. 내가 집에서 종일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조차 나를 지켜야 한다면 첫째, 달갑지 않고 둘째,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한다. 이렇게 지쳐서 결국 나가떨어지기 전에.

메롱은 그런 나를 ‘지나치게 진실하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진실한’.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할 수 없다면 핑계라도 대야하는데 그것을 못한다. 하지만 ‘거절’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한두번 거절하는 말을 가볍게 듣는 걸까? 사람들은? 거절하는 말을 한두번 하면 받아들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사실은 그들에게도 거절을 받아들일만한 핑계를 만들어주지 못한 내 탓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진실하다니, 우습다. 나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진실하게 살지 못했는데.

“만약 관찰력이 뛰어난 전문가가 새별이의 일상을 들여다봤다면, 그냥 무난하기만 한 그 아이의 행동과 외양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였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야.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냥 일상이었던 게 새별이에겐 피투성이 생존 투쟁과 위장의 결과였던 거지.”
<판타스틱 2007년 5월 창간호 46쪽 듀나의 ‘너네아빠어딨니?’>

지나치게 진실하지 못한 유년과 청소년기를 거친 내가 이제 와서 ‘지나치게 진실한’ 이유는 무엇이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지나치게 진실한’ 태도를 요구하는 건 뭘까?

솔직함과 진실함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만한 차이가 있으며 부분적인 진실은 냄새 나는 거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내 삶의 방식에서 배웠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거짓말을 못하게 된 걸까? 핑계를 꾸며대는 게 너무 힘들어진 걸까?

지나치게 진실하지 못했던 내 삶에서 거짓말과 꾸민 태도는 전혀 낯선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거짓은 그 분야에서 써먹은 것만으로 충분해서인가?

가끔 나 자신도 당황하는 나의 냉담함, 무심함은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서 생긴 ‘수동 공격성’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사고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핑계를 꾸며대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의 거절을 ‘거부’할 때, 나는 질질 끌려가지만 꼭 어디선가 이상한 칼로 그들을 ‘쑤셔준다’. 당황스럽다. 마음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

하루 휴가를 주고 팝툰과 판타스틱을 읽고 있다. 이삿짐을 싸든 쓰레기를 버리든 해야할텐데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럴 힘이 없다. 그냥 할 수가 없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뒹굴 뿐이다.

대학을 다닐 때 외국문학을 전공했다. 그 때 전공 교수 한 명이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문예지를 탐독해야 한다고 해서 한 권 사서 읽었다. ‘현대 문학’인지 ‘계간 문학’인지 여하튼 그런 사전 두께만한 잡지였는데, 그것 한 권도 다 못 읽었다. 재미가 없었다. 대학 수업처럼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뭐가 권위고 뭐가 문학성인가? 그리고 문예지 읽기를 포기했다.

판타스틱을 읽고 있자니, 그 때 포기한 문예지 읽기가 생각났다. 나는 그 때 포기하지 말고 뭔가 내 입맛에 맞는 걸 찾았어야 했는데. 하긴 내 입맛에 맞는 걸 아주 못 찾은 것도 아니었다. 뭔가가 끊임없이 나의 레이다망에 걸렸지만 나는 그 때… 잘 모르겠다. 끊임없이 내 삶을 내가 방기한 이유를. 끊임없이 나를 잡아끄는 것들을 외면한 이유를. 나는 삶에 크게 한 번 배신당해서 다시는 그런 것들에 뭔가를 걸고 싶지 않았던 건가…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심지어 동경대를 나왔다는 ‘미확인 비행물체’같은 할아버지 이후로 우리집에서 대학을 들어간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비현실적인 부모, 부모보다 더 비현실적인 아이, 몽상을 안고 들어간 대학에서 내가 느낀 것은 환멸뿐이었다. 고등학교 같은 콩나물 교실, 그보다 더한 대형 강의실에서 ‘그따구’ 수업이나 들으려고 내 청춘을, 고등학교 3년을 단지 ‘참으며’ 살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어찌 그렇게도 어리석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도 교수들과 일하고 있는데 지금의 교수들을 봐도, 오, 잘 나가는 국립대학의 교수님들, 그러나 ‘그따구’ 수업을 하시리라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성실함을 보여주시니…

교원평가제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초중고대학을 막론하고. 평가가 없는 일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뒹굴고 있다. 얼마만의 휴가인가. 비록 다가온 이사와 기말 고사가 두 어깨를 짓누르기는 하나, 오늘만은, 오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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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 1

댓글 1개

에오의 제자님의 코멘트

에오의 제자
이기심과 이타심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이기심쪽으로 가고 싶은데 잘안되는 그런 것일까요? 저한테는 아주 생소하지만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