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는 패러디다> 조현준 지음 현암사·1만3000원. |
젠더는 패러디다
조현준 지음/현암사·1만3000원.
‘주디스 버틀러 읽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다시 한번 불굴의 도전 의지를 불태워도 좋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젠더 트러블>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가 나왔다. 쟁점 위주로 ‘트러블’을 일으키는 버틀러의 개념을 정리하고,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꼼꼼한 해제다.
책을 쓴 조현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2008년 <젠더 트러블>을 번역했다. 책은 나온지 한달 만에 초판이 모두 팔려나갔고, 지금까지 4쇄가 출간될 정도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친절한 해제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번역서를 두고 만난 사람들의 질문과 혼돈에 대한 응답의 차원이었다고 한다.
1990년,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의 가장 기본적 개념으로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전제에 도전한다.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섹스’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를 구분한 건 1968년 로버트 스톨러가 <섹스와 젠더>라는 책을 쓰면서부터였다. 버틀러는 이런 구분이 섹스가 젠더의 근본 바탕이라는 환상만 심어주며, 섹스 또한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주장했다. 섹스 역시 젠더가 작동된 결과이며, 이차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보편 여성’을 타자화하는 문화적 억압과 고정관념의 구조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론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버틀러는 여성이란 보편적인 범주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며 이것이 페미니즘 정치 이론화의 제약이라고 본다. 젠더는 항상 일관된 것이 아니고, 담론적으로 구성된 성·인종·계급·민족·지역·국가 정체성과도 교차된다. 남성 우월론 같은 전체주의적 주장도, 단일화된 여성 범주를 상정하는 페미니즘의 전체화 움직임도 모두 자기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가 ‘무한히 변화하며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패러디·수행성·반복 복종·우울증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남/녀’라는 고정된 ‘본질’이나 ‘원본’이 없기 때문에, 원본이라고 가정되는 복사본에 대한 모방으로 ‘패러디적 정체성’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모방하는 것은 남/녀 근본 자체가 아니라 이상적인 남성성/여성성으로 간주되는 문화적이고 인공적인 이상이다. 하지만 젠더 규범은 강압적이며 호모포비아라는 강력한 반작용까지 존재한다. 이를 발전시켜 후기 버틀러는 인간 보편론의 문제를 심문하기까지 이른다. 지켜줄 가치가 있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의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시민권과 인권을 부여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은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성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실천의 정치학을 강조하기 위해 조 교수는 각 장의 쟁점을 영상물 분석과 연결해두었다. ‘주디스 버틀러, 제3의 철학’ ‘미인시대’ ‘그녀의 무게’ ‘파리는 불타고 있다’ 등 따라붙는 영상물은 손쉬운 행간이지만 사실은 심화 학습의 장이다. 이유진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15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