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모임을 하나 시작하려고 한다.
주로 이성애자인 구성원들은 동성애자/성소수자 상담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칼자루는 내게 쥐어졌으니 내 맘대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이성애자 그룹을 만났을 때, 성소수자인 나의 질문은 '그런데 왜?'였다. '매우 고맙습니다만 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시나요?' '왜 성소수자 인권이 성소수자가 아닌 당신들에게 중요한가요?' '왜 협박 전화에 테러의 위협, 온갖 욕지거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발 벗고 뛰나요?' '심지어 당신들의 모임에는 성소수자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산해진미도 일단 내 배가 부르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좋은 일, 좋은 뜻, 훌륭한 일이라도 내가 목마르지 않은데, 내가 주리지 않은데, 내가 마렵지 않은데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인과 나는 그들의 필요를 알고자 탐색했다.
삶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동성애자/성소수자들과의 인연을 존중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성소수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했고, 누군가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누군가는 성소수자에게 프러포즈를 받기도 했고,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상대방인 성소수자의 마음을 가늠하기도 하면서, 세계관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성소수자도 이웃이라는 종교적인 양심이 작동했다.
나는 대략 이 정도로 정리했다. 개중에는 자기자신에게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남의 다리를 긁기 위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너무 욕심 내지 말이야지. 무지하게 실망스러우나! 쩝!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스스로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뿐 아니라, 인생을 사는 누구에게나 스스로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고, 우리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는지.
언젠가 그런 글을 읽었다. '우리 가족은 선하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는 성장한다고. 무슨 말인가 했다. 우리 가족이 선하지 않단 말인가? 어느 정도 한참 시간이 흘러서, 남의 가족만큼이나 우리 가족을 뚝 떼어놓고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이해했다. '우리 가족은 남의 가족보다 특별히 선하지 않다.' 저 이상한 남의 가족들도 우리 가족보다 특별히 악하지 않다.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우리 가족도 남의 눈으로 보면 충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악할 수도 있다. 고로, 우리 가족이라고 해서 남의 가족보다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무슨 일인지에 따라서, 건건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할 수 있다.
내 동생은 20대에 경로석을 놓고 어떤 할아버지와 싸웠다. '너는 약자가 아니니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노자(老者)가 아닌데요!'라고 말하면서 덤볐다던가.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나, 노인이라고 해서 무례해도 된다고 할 수 없으니 뻔뻔하고 무례한 노인을 싫어하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내 부모도 나도 얼마나 기막힌 짓을 많이 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을까? 말할 것도 없다. (동생만 불쌍하군, 쩝.) 나라면 고분고분 자리를 양보하고 속으로 개무시하면서 욕을 욕을 했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이라, 말이 아니라도 그런 느낌을 전달받은 노인은 '이 더러운 세상!'을 한탄했을 지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원하지 않는지, 자기자신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나는 성소수자 상담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성소수자만 소수자인가?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에 눈 감아 버린다. '난 소수자가 아니야' '난 피해자가 아니야' '난 약자가 아니야'
당신은 정말로 약자가 아닌가?
당신은 정말로 강자이고 싶은가?
다시 한 번 묻겠다. 강자이고 싶은 당신, 정말로 약자가 아닌가?
주로 이성애자인 구성원들은 동성애자/성소수자 상담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칼자루는 내게 쥐어졌으니 내 맘대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이성애자 그룹을 만났을 때, 성소수자인 나의 질문은 '그런데 왜?'였다. '매우 고맙습니다만 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시나요?' '왜 성소수자 인권이 성소수자가 아닌 당신들에게 중요한가요?' '왜 협박 전화에 테러의 위협, 온갖 욕지거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발 벗고 뛰나요?' '심지어 당신들의 모임에는 성소수자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산해진미도 일단 내 배가 부르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좋은 일, 좋은 뜻, 훌륭한 일이라도 내가 목마르지 않은데, 내가 주리지 않은데, 내가 마렵지 않은데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인과 나는 그들의 필요를 알고자 탐색했다.
삶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동성애자/성소수자들과의 인연을 존중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성소수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했고, 누군가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누군가는 성소수자에게 프러포즈를 받기도 했고,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상대방인 성소수자의 마음을 가늠하기도 하면서, 세계관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성소수자도 이웃이라는 종교적인 양심이 작동했다.
나는 대략 이 정도로 정리했다. 개중에는 자기자신에게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남의 다리를 긁기 위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너무 욕심 내지 말이야지. 무지하게 실망스러우나! 쩝!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스스로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뿐 아니라, 인생을 사는 누구에게나 스스로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고, 우리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는지.
언젠가 그런 글을 읽었다. '우리 가족은 선하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는 성장한다고. 무슨 말인가 했다. 우리 가족이 선하지 않단 말인가? 어느 정도 한참 시간이 흘러서, 남의 가족만큼이나 우리 가족을 뚝 떼어놓고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이해했다. '우리 가족은 남의 가족보다 특별히 선하지 않다.' 저 이상한 남의 가족들도 우리 가족보다 특별히 악하지 않다.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우리 가족도 남의 눈으로 보면 충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악할 수도 있다. 고로, 우리 가족이라고 해서 남의 가족보다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무슨 일인지에 따라서, 건건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할 수 있다.
내 동생은 20대에 경로석을 놓고 어떤 할아버지와 싸웠다. '너는 약자가 아니니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노자(老者)가 아닌데요!'라고 말하면서 덤볐다던가.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나, 노인이라고 해서 무례해도 된다고 할 수 없으니 뻔뻔하고 무례한 노인을 싫어하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내 부모도 나도 얼마나 기막힌 짓을 많이 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을까? 말할 것도 없다. (동생만 불쌍하군, 쩝.) 나라면 고분고분 자리를 양보하고 속으로 개무시하면서 욕을 욕을 했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이라, 말이 아니라도 그런 느낌을 전달받은 노인은 '이 더러운 세상!'을 한탄했을 지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원하지 않는지, 자기자신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나는 성소수자 상담보다는 다양한 정체성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성소수자만 소수자인가?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에 눈 감아 버린다. '난 소수자가 아니야' '난 피해자가 아니야' '난 약자가 아니야'
당신은 정말로 약자가 아닌가?
당신은 정말로 강자이고 싶은가?
다시 한 번 묻겠다. 강자이고 싶은 당신, 정말로 약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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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뽀님의 코멘트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