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내가 아니다

2006-03-24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가 제목이 맞는지)였나, 거기 나오는 가사다. ‘그대는 내가 아니다’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다.

책을 한 권 읽었다. [다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하면 노골적으로 비웃는 친구가 있다. 그래, 비웃어라. 나는 어쩔 수 없다. 메롱도 어느 말끝엔가 ‘너는 나를 사귀려고 책까지 읽고, 그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하니?’ 이런 말을 들으면 아프다. 하지만 사귐을 지속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건 거저 오지도 않고 전혀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고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힘든 일을 해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교육하고 있다.

십 년 전에 메롱은 나를 골수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남자애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는 수줍은 애였지만 중학교 1학년 때는 내가 어떤 남자애를 티내고 좋아한 덕분에 우리반 여자애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날 지경이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남자 친구입네, 여자 친구입네 하면서 만나기 시작한 애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만났다. 메롱은 고딩때부터 그 넘 얘기를 숱하게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지나친 범생이었던 까닭에 접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몹시 아쉬운 부분이다. 그 넘과 딱히 스킨쉽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는 게 제일 안타까웠을 때는 메롱과 7년쯤 전에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였다.

어떤 중학교 동창이 나를 더러 그 넘이 너의 첫사랑이 아니냐, 라고 했을 때 나는 갸우뚱했다. 첫사랑? 나는 정말 갸우뚱했다… 아닌데… 그런 느낌이… 그 넘을 좋아하기도 했고 몇 번 손을 잡고 걷기도 했고 싸우고 밥을 건너뛴 적도 있고 화해도 했고 중2부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장장 7년을 서로 여자 친구, 남자 친구인 줄 알고 지내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주소만 들고 새로 이사한 우리 동네로 와서 복덕방에 물어 우리집을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건 스무살에 찍을 만한 영화니까 찍은 거고 감동도 없었고 난처함만 있을 뿐이었다. 그 넘은 나의 첫사랑이 아니다.

대략 한동네에 살면서도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주말마다도 아니고 방학 때, 그것도 한달이나 하는 방학에 한 두 번 만나면서 고등학교 3년을 다녔다니 할 말 다하지 않았나. 그 넘과 나는 그 정도면 됐던 거다. 그렇게 만나는 거에 불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메롱과 헤어지고 나서 일이 년이 지났을 때 나는 갑자기 안타까워진 거였다. 그 넘과 입이라도 맞추고 열렬히 보고 싶어하고 울고 짜고 여튼 뭔가 더 뜨거운 게 있었더라면, 그래서 메롱이 나의 첫사랑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메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메롱이 나에게 그렇게 가혹하다고만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사랑이 뭔지 좀 알았더라면… 메롱이 첫사랑이 아니었더라면…

그게 내가 그넘과의 만남에 대해서 아쉬워한 전부였다. 하지만 여튼 이건 내 사정이고 메롱은 모른다. 메롱은 내가 골수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당연히 이성애자라고 생각했지, 동성애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메롱을 만나고 나서도.

아, 오늘의 얘기는 짧게 쓰고, 요점만 간단히, 집안 일을 좀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또 이렇게 흘러흘러 가는지 몰겠다. 나는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반복을 좋아한다. 피아노라고 몇 달 배우지도 않았지만 체르니보다는 하농이 훨씬 좋았다. 반복되는 것에는 뭔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몸을 늘어지게 해주는 게 있다.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같은 얘기라도 반복할 때마다 뭔가 새로운 얘기가 된다. 다른 면에서 보게 되기도 하고, 전에 얘기한 것과 다른 면을 강조해서 얘기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또 다른 얘기가 된다. 그리고 나는 잘난척하기를 정말 좋아한다. 이건 병이지만(휘유~) ㅋㅋ 고질병이라 쉽게 고쳐지지도 않는다. 반성은 가끔 하는데, 무지 부끄러울 때가 있으니까. 그래도 어렵다. 쉽지 않다. 여튼.

고등학교 이후에도 내 관심은 여전히 남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연애와 섹스, 팔팔한 나이에 비싼 돈 내고 다니는 학교에도 학업에도 이미 좌절했는데 더 이상 뭐에 관심을 두겠는가? 나의 관심은 오로지 연애와 섹스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언놈과 한 번 자볼까? 어쩌다 가끔 메롱을 만나서도 그런 얘기만 했을 테니, 게다가 메롱은 독특하게 노골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 얘기를 더 부추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7년이나 한 넘을 미적지근하게 만났다는 게 내가 미국에 살았다면 내 친구나 부모는 충분히 ‘저 애가 레즈비언이 아닐까?’ 생각했을 것 같다. 메롱이 나에게 은근슬쩍 그런 얘기를 부추긴 것도 나름대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나를 계속 탐색하느라고, 아아, 머 이런 추측까지는 쑥스럽지만 그래도 의심해볼 만은 하다. ㅋㅋㅋ

십 년 전에, 해도 바뀌었는데 계속 십년 전, 7년 전 이러는 것도 우습다. 그러니까 199X년에 내가 메롱과 사귀기 시작한 것은, 초장에 헤어지자는 메롱과 헤어지지 못한 것은, 매일 울고불고 하면서도 헤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메롱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가 아니면 안 돼… 199X년(3년 반 후)에 메롱과 드디어 헤어진 것은 사랑이 배신당했다고 믿었고 더 이상은 배신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났고 이 년쯤 사귀다가 헤어졌고 그리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친구들의 난’을 겪으면서 혼자 지냈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삶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고된 삶을 살면서 ‘이것이 인생이다’를 배우고 있고 (웃어주시든지, 남들 다 하는 하루 일과가 나에게는 어찌나 고된지… 쩝). 그러니까 이제 ‘네가 아니면 안 돼’라는 것은 한낱 주장에 불과하며 또는 한낱 오만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이건 사실 어려운 문제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메롱처럼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의미로든지. 메롱은 전에는 내가 미적지근 7년 만난 넘을 수시로 입에 올리며 날 괴롭혔고(그때는 정말 괴롭혔다, 그렇게 의심할 거면 도대체 왜 이성애자라 굳게 믿는 인간을 꼬셨냐고???) 지금은 메롱과 헤어진 후에 만나서 2년을 사귄 사람을 가끔 입에 올리며 날 비웃는다. 이건 별로 괴롭진 않다. 옛날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고 (이제 드디어 그런 질투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메롱도 깨달은 거지, 그런 깨달음을 준 메롱의 그간의 여인들에게 건배를!! 으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메롱 귀에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 질투할 때의 메롱은 머리통은 어디로 날아가도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뇌와 귀가 날아가고 비열한 입과 눈만 남는 인간이 되는 건지, 어쨌든 요즘에는 강도, 빈도가 다 옛날과는 비교도 안 되고 나도 ‘아 또 시작이시네’ 하고 말기 때문에 대략 별 것 아닌 채로 넘어간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는 이거다. 메롱은 친구일 때도 애인일 때도 나름 특별했다. 사실 애인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생을 통틀어 두 명이니까 별로 비교할 건덕지가 없다. 아, 여기서 재밌는 장면이 생각나는데, ‘섹스앤더시티’에서 변호사가 아이를 낳고도 한참 있다가 아이 아버지인 스티브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바로 같은 아파트에 변호사가 직전에 사귀던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변호사는 그 남자가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스티브와 합치는 일로 많이 상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삿날, 스티브의 집을 옮기는데 사람이 자리에 없는 사이에 티비가 부서졌다. 변호사(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는 그 남자가 해꼬지를 한 거라고 생각한다. 스티브가 격분해서 그 남자의 아파트로 쫓아올라갔을 때 그 남자는 변호사는 벌써 잊었는지 한꺼번에 여자 두 명과 함께 있었다. 스티브는 돌아와서 여전히 그 남자가 질투할 거라고 믿는 변호사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친절한 스티브… ㅋㅋ

오늘의 중구난방이 참… 회사에서 시달림을 안 당했더니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아직 청소도 더 해야 하는데 ㅠㅠ

[다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늘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다짐하는 사람은 부부가 힘든 일을 당할 때 이겨 나갈 힘을 줍니다. 때로는 밉고 원망스럽더라도 다짐하세요.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겠다, 내 사랑을 지켜나가겠다’ 하고요. 두 사람이 그것만 할 수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짐하는 사랑만이 결혼을 지킨다’라는 장에서 따왔다. ‘불륜은 본능이다’라는 장도 있다. 목차에서 ‘초라한 가족이 화려한 싱글보다 낫다’는 장의 제목을 읽고 책을 사기로 결심했다. 돈을 주고 사서 읽으려는 분이 있다면 말리지 않겠다. 불후의 명작은 아닐지라도 나는 배울 점이 있었다. 이 책에 공감한다면 김혜남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책도 정말 괜찮다. (책 판매 사원같다.)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