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몸§아줌마§포르노§] 나는 무엇을 떠나 보내야 하는 걸까

나는 무엇을 떠나 보내야 하는 걸까

 

작년 9월에 급히 이사를 했다. 

원래는 그리 급히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내가 살던 집에 들어올 사람도, 

내가 이사 갈 집에 살던 사람도 모두 되도록 빨리 하기를 바라시기에 

어쩌다 남의 일정에 맞춰 급히 했다. 

덕분에 전세 대출도 못 받고 마이너스 통장으로 전셋값을 맞췄다. 대책 없다.

 

이사를 하고 다음 날에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했다. 

아주 어릴 때 마당에서 키우던 큰 개가 기억난다. 

겨우 기억이 날 정도로 어릴 때라 내 손으로 키워봤다고는 할 수 없다. 

무개념으로 강아지를 입양했다. 

유기견이었는데, 입양을 주선하는 사람이 불임수술을 시키라고 하도 강력하게 말해서, 

한 두 마디 항의했지만 기가 눌려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 길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강아지가 수술을 받는 동안 먹이, 간식, 목줄, 가방 등을 전부 샀다. 

마취가 깨지 않은 강아지를 새로 이사 온 집에 데리고 왔다.그날부터 사연 많은 동거가 시작됐다.

10월에 회사 정기 건강검진에서 목에 혹이 있으니 검사를 받으란 얘길 들었다.

 그 얘길 듣기 하루 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상사가 갑상선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았단 얘길 전해 들었다. 으음… 이게 뭘까…

회사 근처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소견서를 받아서 종합병원에 갔다. 

종합병원에 갈 때는 애인인 크리스와 같이 갔다. 의사는 처음 진료에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작은 병원의 의사고 큰 병원의 의사고, 의사란 의사는 뭐든 똑 부러지게 말을 안 해 주는데

(암이 아닐 수도, 암일 수도, 암이 되기 직전의 단계일 수도), 코디네이터를 만나라고 해서 

진료실 옆 방으로 들어갔더니 내가 암환자로 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되었다고 말해 준다. 

똑 부러지게 말을 안 해주는 의사 선생님이 똑 부러지게 등록은 해주셨다고.

11월 초에 수술을 받고 저요오드 식이를 하고 12월에 항암치료를 받았다. 

갑상선암은 항암치료가 단순하다. 

생존률이 높아서 과연 암이라 할 것인가, 라는 논란이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처음 입원, 처음 수술, 처음 암이었다. 

여태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건지.

 

병원에 한참 다니던 10월에 크리스와 함께 타임스퀘어라는 쇼핑 센타에 갔다.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가게에서 시든 수국 사진을 봤다. 시들어 마른 수국꽃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마음에 와 닿았다.

 

미국 애니메이션 업(UP)을 보면 

죽은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기 싫어서 집에 온통 풍선을 매달아 집과 함께, 
아내의 추억과 함께, 
평생 살아온 삶과 함께, 
아내 생전에 함께 가기로 했던 모험 동산으로 떠나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아주 볼만한 애니메이션이다. 

어릴 적 꿈꾸던 것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모험을 하게 된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그 집을 떠나 보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떠나 보낸 집은 아내와 함께 꿈꾸었던 아름다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위에 

마치 그린 듯이, 마치 계획한 듯이 자리 잡는다.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로 기억한다. 

쌍둥이 딸을 낳은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가 죽음의 신에게 호소한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겠는가? 

제발 저 어린 것들을 돌볼 수 있도록 나를 데려가지 말아달라…’ 

사신은 갈등에 빠졌지만 어쨌든 결국 어머니는 죽게 된다. 

죽으면서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갓난 아이의 발등을 누른다. 

십 수 년 후에 두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했지만 한 아이는 발목을 절고 있다.

 갓난 아기일 때 죽은 어머니의 시신에 눌려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의 걱정과 달리 두 아이는 한 집에 입양되어 보살핌을 잘 받고 자랐다.

 

시든 수국 그림을 산 건 방사선 치료도 끝나고 외출을 맘대로 할 수 있게 된 작년 연말께다. 

크리스는 처음에 그 그림을 싫어했지만 내가 좋다고 하니 나중에는 사라고 했다. 사주었나?

 

내가 퇴원한 이후에 크리스는 암보험을 새로 들었다. 

나의 발병 때문에 졸지에 고위험군이 된 동생에게도 암보험을 들라고 했는데, 
아직 들지 않은 것 같다.

 

한 달쯤 전에 집에 혼자 있다가 [별을 쫓는 아이]라는 일본 만화영화를 봤다. ‘지금 사랑하라, 

이별을 받아들여라, 다시 혼자 길을 떠나라’ [별을 쫓는 아이]를 보고 나서 적은 메모다.

 

지난 주말에는 여성영화제를 포기하고
 ‘비혼과 퀴어를 위한 찬란한 유언장’을 작성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크리스와 나는 각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유산이 서로에게 돌아가도록 유서를 썼다. 

쓴 날짜와 이름과 도장/지장이 꼭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일주일 내내 들고 다니다가 어제 드디어 인주를 사서 엄지 손가락 도장을 꽉 찍었다. 

크리스는 도장이 있다면서 아직도 안 찍었다. 난 도장이 없어서 손가락 도장 찍었는데.

아, 보험금은 보험회사와 개인의 계약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유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크리스와 나는 지금 ‘법정상속인’으로 되어 있는 수익자를 바꾸기로 했다. 

보험사에 따라서 안 바꿔 주기도 한다는데, 잘 알아봐야지.

 

나이 사십, 크리스는 사십 여덟. 먹을 만큼 먹었다.
 이제는 언제라도 우리 몸에 병이 생길 수 있는 나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마음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자,

살도 좀 빼자,고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나이 먹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는 게 삶이다. 말은 얼마나 쉬운가? 

마음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는데 말은. 얼마나. 쉬운가. 어쩌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