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있고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시니...
뭐랄까... 이이 님... 이런 고민이 전혀 없는 이반도 드물리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가 있고 가족의 바람을 등질 수 없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아니면 상대방, 아니면 둘 다, 아니면 "종교"나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라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는 있겠죠.
가장 적대적인 종교가 기독교이다 보니 혹시
이이 님이 말씀하시는 종교도 기독교가 아닌가 합니다만,
어느 종교가 됐든, 종교가 사랑에 걸림돌이 된다고 하면,
과연 어느 예언자, 어느 메시아, 어느 부처가 달갑다고 할지...
동성애 또는 성소수자 운동을 하는 목사도 꽤 있습니다. 외국에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회도 꽤 있고요.(이단 아닙니다-.-;;;) 올해 종로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했던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김현숙 씨도 카톨릭 신자입니다.
결국 모든 제약은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닐지...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거의 40이 되도록, 실은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러는데 제가 처음 알았을 때 그 언니는 정말 얼굴이 훨씬 젊어보여서 마흔이 다 됐다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더라고요. 제가 마구 친근하게 대한 것이 좀 미안할 정도로요.
근데 여튼 그 언니,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하지만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 수도 없어서, 그저 조용히 자기를 누르고 살고 있었죠. 그러다가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우연히 직장에서 만난 이반 친구에게 고백을 들었어요. 그때 맘 속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저는 그때는 그 언니와 친구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한 동안은 그 친구를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얘기만 들어도 너무너무 공감이 갔어요. 그 언니의 조용한 삶과, 자기자신을 억누른 삶과, 그 때문에 펼치지 못한 삶의 에너지와, 그 친구를 만났을 때의 감동, 왜냐면 그게 곧 자기자신을 마주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일생에 내놓고는 처음으로, 그런 식으로 그 언니가 '폭발적으로' 느꼈을 갖가지 정서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모든 정서가 너무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거죠.
'남들이 만든 교리를 수용하고 나를 부정하고, 가족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고 나를 외면하고, 그런 삶이 과연 진실한 삶이 될 수 있을까?'
기능적인 아내, 기능적인 어머니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은 막상 빠져버린 삶,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삶', 그런 아내와 사는 남편은 행복할까? 그런 어머니의 아이들은 행복할까요?
소수자로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자기자신에게조차요.
최근에 만난 어떤 20대 친구는 '사회단체 활동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많은 돈을 벌지 못할 텐데, 부모님이 나에게 제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앞으로도 누리고 싶다. 그러나 빈곤구제를 위해 일한다면서 나는 잘 먹고 잘 산다면 - 월급을 많이 받고 적게 받고를 떠나 - 나 자신이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뭐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 속에 있더군요.
저는 그 친구가 꼭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회 운동을 한다고 해서 빈곤하게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죠. 청렴과 빈곤은 다른 거잖아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미국 남부의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들이 퍼뜨린 기독교라고 해요. 결국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인 거죠. 이 기독교가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라고요.
작년에 '차별 금지법'에서 성소수자 차별 조항이 삭제된 후로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기독교를 반성하고 성소수자를 위해서 운동하기 시작한 기독교인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거의가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이에요. 네이버의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라는 까페를 둘러보세요.
아, 제가 힘이 좀 달리네요. 식은땀이 줄줄... 쩝...
이이 님을 꼭 설득하려는 건 아니에요. -.-;;;
이이 님이 말씀하신 그 부분이 굉장히 보편적인 이반의 고민이라서 저도 모르게 또 불끈했네요.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어요. 일반으로도 이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양식은 선택하기 나름이니까요. (이 말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반이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라는 뜻은 아니예요.) 저의 친구 중에도 결혼하고 아기 낳고 아주 행복하게 사는 '예전의 이반'도 있고요.
그 사람은 '다른 도전'을 선택한 거죠.
'너무나 연약한, 깨지기 쉬운 이반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준 상처를 저는 아직도 느껴요.
다른 도전이 그 사람에게 도피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하고 여전히 친구할 수 있어요.
이이 님도, 이이 님이 아끼는 그 분도 용기를 잃지 말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뭐랄까... 이이 님... 이런 고민이 전혀 없는 이반도 드물리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가 있고 가족의 바람을 등질 수 없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아니면 상대방, 아니면 둘 다, 아니면 "종교"나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라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는 있겠죠.
가장 적대적인 종교가 기독교이다 보니 혹시
이이 님이 말씀하시는 종교도 기독교가 아닌가 합니다만,
어느 종교가 됐든, 종교가 사랑에 걸림돌이 된다고 하면,
과연 어느 예언자, 어느 메시아, 어느 부처가 달갑다고 할지...
동성애 또는 성소수자 운동을 하는 목사도 꽤 있습니다. 외국에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회도 꽤 있고요.(이단 아닙니다-.-;;;) 올해 종로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했던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김현숙 씨도 카톨릭 신자입니다.
결국 모든 제약은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닐지...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거의 40이 되도록, 실은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러는데 제가 처음 알았을 때 그 언니는 정말 얼굴이 훨씬 젊어보여서 마흔이 다 됐다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더라고요. 제가 마구 친근하게 대한 것이 좀 미안할 정도로요.
근데 여튼 그 언니, 가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하지만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 수도 없어서, 그저 조용히 자기를 누르고 살고 있었죠. 그러다가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우연히 직장에서 만난 이반 친구에게 고백을 들었어요. 그때 맘 속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저는 그때는 그 언니와 친구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한 동안은 그 친구를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얘기만 들어도 너무너무 공감이 갔어요. 그 언니의 조용한 삶과, 자기자신을 억누른 삶과, 그 때문에 펼치지 못한 삶의 에너지와, 그 친구를 만났을 때의 감동, 왜냐면 그게 곧 자기자신을 마주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일생에 내놓고는 처음으로, 그런 식으로 그 언니가 '폭발적으로' 느꼈을 갖가지 정서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모든 정서가 너무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거죠.
'남들이 만든 교리를 수용하고 나를 부정하고, 가족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고 나를 외면하고, 그런 삶이 과연 진실한 삶이 될 수 있을까?'
기능적인 아내, 기능적인 어머니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은 막상 빠져버린 삶,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삶', 그런 아내와 사는 남편은 행복할까? 그런 어머니의 아이들은 행복할까요?
소수자로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자기자신에게조차요.
최근에 만난 어떤 20대 친구는 '사회단체 활동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많은 돈을 벌지 못할 텐데, 부모님이 나에게 제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앞으로도 누리고 싶다. 그러나 빈곤구제를 위해 일한다면서 나는 잘 먹고 잘 산다면 - 월급을 많이 받고 적게 받고를 떠나 - 나 자신이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뭐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 속에 있더군요.
저는 그 친구가 꼭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회 운동을 한다고 해서 빈곤하게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죠. 청렴과 빈곤은 다른 거잖아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미국 남부의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들이 퍼뜨린 기독교라고 해요. 결국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인 거죠. 이 기독교가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라고요.
작년에 '차별 금지법'에서 성소수자 차별 조항이 삭제된 후로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기독교를 반성하고 성소수자를 위해서 운동하기 시작한 기독교인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거의가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이에요. 네이버의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라는 까페를 둘러보세요.
아, 제가 힘이 좀 달리네요. 식은땀이 줄줄... 쩝...
이이 님을 꼭 설득하려는 건 아니에요. -.-;;;
이이 님이 말씀하신 그 부분이 굉장히 보편적인 이반의 고민이라서 저도 모르게 또 불끈했네요.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어요. 일반으로도 이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양식은 선택하기 나름이니까요. (이 말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반이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라는 뜻은 아니예요.) 저의 친구 중에도 결혼하고 아기 낳고 아주 행복하게 사는 '예전의 이반'도 있고요.
그 사람은 '다른 도전'을 선택한 거죠.
'너무나 연약한, 깨지기 쉬운 이반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준 상처를 저는 아직도 느껴요.
다른 도전이 그 사람에게 도피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하고 여전히 친구할 수 있어요.
이이 님도, 이이 님이 아끼는 그 분도 용기를 잃지 말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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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K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