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헐렁한 칼도 있을까? -1

2007-09-27

묶여 있지만 자유를 원하고 자유를 원하지만 아무 것에도 묶이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칼. 죄인을 가둘 때 썼던 형구의 하나.


추석 연휴
처음 이틀 동안 회사에 나간다고 거짓말 하고 엄마집에 가지 않았다. 아마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엄마집에 가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집에서 누군가 놀러 오라고 하거나 뭘 먹으러 오라고 하거나 어딘가에 술 마시러 가자고 하거나 했다면 나는 거절하기 위해서 분명히 몇 마디 말을 더 했을 것이고 그 몇 마디 말이 여의치 않았다면 곧 끌려 나갔을 것이다. 어디로건. 어쩌면 ‘나도 나가고 싶어’라고 생각하면서 나갔을지도 모른다. ‘아, 심심해’ 하면서 나갔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나는 내가 뭘 원하고 뭘 원하지 않는지, 뭘 얼마나 원하고 얼마나 원하지 않는지 헷갈려 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두 가지를 또렷이 구분하지 못하면서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낫다. 내가 좀 더 오래 혼자 있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낫다. 한 두 마디라도 아끼는 편이 낫다. 말만 시작하면 곧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니까. 내가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왜 변명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으나, 변명하지 않고 말하기는 당장 여의치 않으므로, 변명을 하느니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편이 낫다가 될 수도 있으므로, 나는 그저 거짓말하는 쪽을 택하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택해야 겠다.

하루는 늦잠을 자고 목욕탕에 다녀왔다. 목욕탕은 아주 작은 동네 목욕탕, 여성 전용탕이었는데, 내가 모르는 마사지실이며 여러 설비가 있는 건지 작은 주방이 있었고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었다. 아주 작은 동네 목욕탕에 라면이나 잔치 국수를 파는 주방이 있는 걸 보니 거기서 꽤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살림이 천정까지 가득 들어찬 주방을 보면서 문득 내가 주방을 꽤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새삼스럽게. (나는 사무실에 살림 차렸다 소리를 들을 만큼 먹을 것 및 관련 살림살이를 많이 가져다 놨다.) 오래 전 대학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생각 났다. 그 때는 정말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군’ 하면서 읽었는데 몇 년 후에 요시모토 바나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작가가 되었다. ‘너를 사랑한다, 주방. 너와 함께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산에 갔다. 북한산. 우이동 쪽으로 갔는데 수유 역에서 우이동 가는 버스를 잘못 타서 헤맸다. 환승은 두 번만 되는 줄 알았는데 네 번이나 됐다. 잘못 들어간 버스 종점에서 다시 수유역으로 나와서 중앙차로로 가는데 ‘도를 아십니까’의 무리가 끼어들었다. ‘복이 많게 생겼다’든가 늘상 하는 말을 읊으면서 내 팔을 스쳤다. 이 사람들, 십수 년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는 말하면서 몸을 만진다. 그것도 교육 받은 스킬인 것 같다. 늘 똑 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면. 그런데 나는 낯선 사람이 날 스치는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이다. 원래 못 참는데 평소에는 열심히 참는다. 싫어하면서. 그날은 내가 분명히 ‘말하기 싫다’는 사인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 팔을 스치는데 평소에 열심히 감춘 분노가 폭발했다. ‘건드리지 말란 말야!!’ 거리 소음이 하도 커서 내 목소리가 묻혀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랐다. 인내심 없음은 체력 저하의 뚜렷한 증거다. 도대체 눈으로 목격한 버스의 성추행범에게조차 ‘그러시면 안 돼죠’ 존대말을 쓰던 (그건 분명히 띨빵한 짓이긴 했지만) 나는 어디로 갔는가. 갑자기 터져나온 분노 때문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분노, 분노, 이걸 좀 터뜨리면서 살고 싶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런 장면을 당하면 당황스럽다. (내가 화내고 내가 당했다니까…할 말 다했지)

셋째날은 명절 전날이라 엄마집에 갔다. 사촌 올케가 딸 셋을 데리고 오고 셋째 작은 엄마가 왔다. 5촌 큰조카가 놀이터에 가서 놀자고 떼를 써서 나는 애 셋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다. 첨에는 돌이 한 달 남은 막내까지 안고 나가서 위로 두 애가 노는 걸 지켜봤다. 막내가 한 시간 정도는 얌전히 안겨 있더니, 나중에는 두리번거리며 제 엄마를 찾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막내를 데려다 주고 다시 나와서 나머지 두 애들과 잡기를 하며 정신 없이 놀았다. 놀이터에는 대부분 남자들이 자기 애들이나 사촌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들도 꽤 있었고 중간에는 경찰도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카의 아비인 내 사촌 남동생은 오늘도 사무실에 나갔다고 한다. 회사원도 아니고 자영업자인데 명절 전날 사무실에 나가다니. 주말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사무실에 나오던 아저씨를 떠올리니 얼굴이 찌푸려졌다. (주말 수당도 안 주는 회사에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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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