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님


지영님, 마음 아픈 사연 남겨주셨군요.
글을 남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용기를 내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에요.

지영님 스스로 자신이 이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어떠한 확신도 갖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그 친구를 위해서 관계를 멀리하고 있는 중이고요.

내 자신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의 문제 하나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 마련인데,
이 와중에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의 문제가 지영님을 더욱
힘겹게 하는 것 같아요.

우선, 지영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스스로 이반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모으고, 접하면서
지영님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많은 시간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치는 과정이지요. 혼자, 혼자서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만을 옳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저희 상담소 활동가들 역시 지영님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어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영님처럼
상담소를 찾기도 하고,
레즈비언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이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
깊이 생각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어요.
지금 상담을 하고 있는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아무리 강요해도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고, 이제 '문제는 레즈비언인 내가 아니라 레즈비언으로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문제이다'는 생각을 가지기에 이르렀죠.

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 고통의 시간이 짧으면 좋으련만
생각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해결되지 않기도 해요.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답니다.

그래서 지영님께 이반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거에요.

이 곳, 상담실에 있는 다른 이들의 고민도 하나하나 살피면서,
또 레즈비언들이 모여 있는 모임도 찾아보고, 가입도 해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영님의 고민을 나눌 수 있을 거에요.

아직 지영님 스스로 자신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데, 지영님은 그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계시네요.

힘들겠지만, 지영님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에요.
지영님 마음 안으로 들어 온 그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두려움도 클거에요.

하지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에게
어떠한 설명도 없이, 지영님이 힘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슬프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친구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아니에요.
지영님 스스로 지영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지영님의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아요. 동성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어 온 일들이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서도 진심을 감추고, 연기하듯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의 고통은 더욱 커지죠.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꼭 레즈비언들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죠.

지영님.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힘이 들겠지만, 지영님의 마음을 일부만
살짝 숨겨놓는 거에요.

친구도 지영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고,
지영님도 이렇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데, 그럼 친구와 지영님은
아주 특별한 관계인거잖아요.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친구가 그렇게 하듯이, 지영님도 지영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에요.
완전히 다 보일수는 없다고 할지라도요.

지금 당장 관계를 끝내기 보다 서로를 더 알아가고,
자기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언젠가 지영님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몰라요.
꼭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친구가 지영님의 특별한 친구로 남게 된다면,
지영님이 가진 삶의 짐을 덜어주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지영님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소중해요.
그리고 지영님 역시 그 사람들에게 참 소중한 사람일 거고요.

지영님.
지영님의 작고 큰 고민들,
오래도록 함께 나누고 싶네요.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라도,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플때면
들러주세요. 전화를 주셔도 좋고요.

다시 한 번,
아픈 사연 나눌 수 있는 용기에 격려의 말씀을 드려요.

-200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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