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dy님 상담소입니다.
먼저 상담이 지연되어 많이 걱정하셨지요?
정말 죄송해요 매번 답변글 올라왔는지 확인하시면서
갖고 계시던 고민 만큼이나 상담글이 고민거리가 된 건 아니었을지 걱정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나마 뒤늦게 올린 상담글이라도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본인을 팬픽이반으로 정체화 해도 되는 것인지,
본인이 갖고 있는 감정을 이반이라고 정의해도 되는지 궁금하시다고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예시로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친구,
지금도 맘이 가는 친구가 있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고요.
또 만약 정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물어 주신 것 같았어요.
어려운 문제지만 첫번째 문제 부터 같이 이야기를 해볼게요.
저는 팬픽 문화라는 것이 이반 정체성과
어떻게 직접적인 원인 결과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죄송해요.)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해서
누구나 완전범죄를 기획하는 범죄자가 된다고
말하기도 참 어렵고,
누구나 완점범죄의 결점을 찾아내는 해결사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추리소설에서 재미를 느끼고
또 추리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와 사건의 배경 속에서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고 또 일상에 이를 적용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소설이 갖는 나름의 간접적 영향력은
적지 않겠지요?
대부분의 (꽤 많은)팬픽 문화가 동성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것이 장난스럽건 진실함을 담고 있건
하나의 문화창작물로서 읽는 이에게 큰 감동과
여러가지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끼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 팬픽을 보는 10대 청소년 중에
동성애와 관련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경우가 꽤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학이나 정규 교과서, 혹은 저녁 뉴스에서는
동성애를 "비정상"이라고 보거나 "숨기기"에 급급해서
딱히 접하기도 어렵고 상상하기도 어려운데
팬픽에서는 동성관계가 자연스럽고 또 애뜻하게까지 그려지곤
해서 정말 이성관계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에 울고 웃듯
큰 반감 없이 거기게 빠져들 수 있는 것 같아서요.
이런 맥락에서 팬픽 이반이라는 정체성을
탐색하게 될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저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정체성을 탐색하기에 많은 정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관계에 자신을 이입하고,
일상에서 누군가를 대할 때 이런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물론 팬픽을 읽는다고 모두가 자기 정체성 고민하면서
다양한 정체성에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건 또 아니죠.
팬픽은 팬픽대로 즐기면서 동성애자를 경멸하는 분들도
많이 봤습니다.
게이커플은 봐줄만 한데 레즈커플은 역겹다는 제 중학교 친구도
팬픽에 미쳐서 사는 친구였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누구보다
심했습니다.)
다만 조금 조심스러운 것은
팬픽에 등장하는 관계나 연애방식, 인물상이
동성관계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하거나
현실에서도 100% 재현될 수 있다는 바람을 갖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은 팬픽을 접해 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여러가지 문학적 장치들이
도입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막연히 "동성애는 위험해"라고 경계하는 것도
막연히 "동성애는 멋져라"라고 기대하는 것도
조금 위험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팬픽 때문에 혹시 내가 이반이 된거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정도로 다루면서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볼까 하는데요.
저는 사실 님이 팬픽이반이건, 순수(?)레즈비언이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 님에게 필요한 고민과 질문은
최근 관심이 생기게 된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다뤄보면서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실 "무엇 때문에" 이반이 됐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꾸 원인을 묻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같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이유를 찾는 방법은 스스로를 긍정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원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원인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나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님은 000입니다"라는 답이 아니라,
"님 뭐든지 간에 님을 지지합니다"라는 응원입니다.
팬픽에 심취해서 동성 관계에 호기심이 생기신 거라고 해도,
여학생만 가득한 교실에서 남자를 못만나 이반이 된거라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성애만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회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이야기 하는 제가 이상해 보이실지 모르지만, 저는 오히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반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부터 당신이 이성애자는 걸 알았죠?"
"어떤 특별한 삶의 상처 때문에 이성애자 된 건 아닌가요?"
"평소에 할리퀸소설같은 이성애 로맨스물을 많이 봤나요?"
"대체 어쩌다, 왜 이성애자가 된거죠?"
"제가 이해할 수 있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 보세요"
라고 답변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원인을 찾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또 원인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내가 지금 맘이 가는 친구에게 느끼는 이 감정에 대해
한 번 연구해 보세요.
예전에 그냥 친하기만 했던 애들에게 느끼던 것과는 뭐가 다른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할 때랑은 뭐가 다른지,
만약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은지,
그런 삶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면과 아닌 면 어느 쪽인지,
이런 종류의 질문들과 함께요.
그런 탐색에서 오히려
아 정말 이 감정을 다른 것과 다르게
특별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감정에 나름의 이름을 붙이시면 됩니다.
꼭 동성애라든가, 레즈비언, 이반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내게 아주아주 의미있는 사람에게 갖게 되는 감정이라던가,
이건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에게 표현하고픈 감정이라던가
어떤 방식이건 저는 일단 특별한 누군가에게 느끼는
감정 그 자체에 좀 주목을 해 보시라 부탁드리고 싶어요.
"팬픽이반이면 어쩌지?"라는 불안은
"그 아이를 보면 너무 두근거려요"라는 따뜻한 마음과
함께 가기에는 무게도 어둠도 너무 크고 짙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한 번 정해진다고 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느 정체성을 반드시 이마에 붙여야 그것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이름 붙이기의 부담은 잠시 내려 놓으시고,
천천히 고민하시기를 바라요.
제 답변이 너무 두루뭉실해서 갑갑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열쇠는 Moody님 본인이 갖고 계시답니다.
정체성은 팬픽만 본다고, 여자만 좋아한다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정서적 안정감,
나를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단어,
뭐 이런 복잡한 것들로 설명되곤 합니다.
내가 어떤 특별한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나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또 그런 나 자신을 바라 볼 때 제일 편안함이 느껴지고,
한 편으로 그런 나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펼쳐 낼 수 있다고 생각이 들 때 그 때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본인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이시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는 건 당연해요.
다만 그 고민 과정에서 "동성애는 안돼"라는 제한 된 선택지로
고민하시진 마시라고 꼭 당부드립니다.
어떤 모습이건, 어떤 감정이건 지지 받으실 수 있어요.
용기를 내서 한 번 만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번 상담은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해요.
고민 과정에서 더해지는 여러 궁금증들은 또 나눠주세요.
상담소였습니다.
100504007
댓글 1개
Moody님의 코멘트
Moody그때상담원님들께서도바쁘셨을텐데재촉만해서죄송합니다
너무혼란스러웠나봐요 ㅠㅠ
정말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