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가나다님, 한국 레즈비언 상담소입니다.
400일 넘게 사귄 애인분과의 이별 때문에 상담소에 글을 남겨 주셨군요.
가나다님은 아직 그 분에게 애정이 있으시지만
그분은 어머니의 반대 때문도 있고, 또 마음이 식어서
가나다님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적어주셨어요.
헤어지긴 했지만 도저히 그분을 잊을 수 없어서
자꾸 생각나고, 너무 힘이 든 상태이시군요.
우선 지금까지 힘든 시간을 견디고 계셨을 가나다님께
응원의 말씀부터 전해드리고 싶어요.
이별은 누구에게나 너무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특히나 레즈비언일 경우에,
친구들이나 다른 지인들에게 제대로 말하기 힘들고
위로받기도 힘들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힘든 경험으로 다가오기 쉽잖아요.
여러 모로 이야기하기 힘든 일이 많으셨을 텐데,
혼자 그 시간들을 견디셨을 가나다님께
지금 상담원이 드리는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정말 사랑하고 아꼈던 애인과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방식으로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을 생각나게 해서
아마 지금 가나다님께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런 때일수록 가장 먼저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 필요하답니다.
지금 가나다님께서 그분과 헤어지신 지 얼마나 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글을 적어주신 걸로 보아서
그렇게 오래 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요.
좋든 싫든지간에 이별이라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상처의 강렬함이 조금 줄어드는 때가 될 때까지는, 역설적이지만
아픈 만큼 아파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억지로 다른 일을 생각하려고 하고,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억누르려고 하면, 표현되지 못한 그 마음들이
다른 방식으로 가나다님을 상처주게 된답니다.
지금 너무 아프고, 힘들고,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별 후에 당연하게 찾아오는 과정 중의 하나입니다..
비록 그것이 본인에겐 너무 고통스러울지라도 말이에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이라는 병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사건을 겪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증상들을 말하는 병이에요.
그런데 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은,
그 '사건' 이 6개월 이내에 일어난 일일 경우에는
진단하지 않습니다.
즉,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서 충격과 고통을 받았을 때
6개월 정도는 너무 힘들고, 아프고, 괴롭게 보내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당연하다, 그러니 '병'이 아니다, 라는 것이에요.
이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일개월에서 이개월 정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간을 거쳐야
조금은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고 해서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스스로가 회복될 수 있도록
자신을 추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해요.
일단 지금은,
믿을 수 있는, 그러니까 가나다님과 그분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분을 많이 만나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지금 가나다님께 필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지금의 힘듬을 이야기하고 함께 나눌 친구들이랍니다.
격언 중에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괜한 말이 아니에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공감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많은 위로를 받고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힘든 일에 대해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많은 위로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자신의 말에 공감해 주고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어떤 상담사보다도,
지금 가나다님 곁에 있는 친구가 더 좋은 치료사일 수 있어요.
혹은,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든 털어놓아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또, 시간이 조금 지나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조금 생겼다면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는 등
이전의 애인과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해 보세요.
예전에 애인과 했던 일들과 겹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만한,
그러면서도 자신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몰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활동을 찾아서 해보시는 거에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기운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다 보면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는 좋은 활동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새로운 활동 범위를 만들어서
예전의 애인과의 일 때문에 상처받는 일을 줄일 수도 있구요.
이 다음에 드릴 말씀은 상담원인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제가 하는 말이 결코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가나다님께서 참고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 봅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가나다님께서는
미성년자인 자신이 그분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고,
'몸이든 마음이든 다 주었다' 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물론 첫사랑, 첫키스, 첫 섹스는 누구에게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으니
그 상대에게 더 애착과 정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처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커다란 의미부여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첫사랑이기 때문에 더 보낼 수 없고,
첫키스이기 때문에 더 이 사람과 오래 있어야 하고,
첫 섹스를 한 상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애착이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결국
상대방 생각이 더 많이 나고,
이 사랑에 더 많이 집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 미성년자라는 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기 어렵겠지만) 너무 크게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아직 청소년의 성에 대해서 너무나 보수적이고
그래서 청소년의 연애, 성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문화인 게 사실이지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경험이 있으면서도 쉬쉬하고,
그것에 대해 (어른들이 있을 때는) 이야기하는 것도 금지당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것들에 대해서
'어른은 괜찮다' '미성년자는 안된다' 라고 정해놓은 건
누구의 기준에 따른 것일까요?
사실 '성년' '미성년' 이라는 구분자체도
민법, 형법상 나이가 다 다를 정도로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기도 해요.
2011년 12월 31일까지 술도 담배도 못 하던 사람이
2012년 1월 1일부터 자 땡! 하고 술도 담배도 다 합법이 되는,
또 똑같은 나이의 청소년이 맥주를 마셔도
독일에서는 합법이고 한국에서는 불법인,
너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 둔 개념일 뿐이지요.
보통 청소년에게 '그런 건 아직 안 돼, 어른이 된 다음에 하렴' 이라고
금지해 놓은 것들은
어른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별로 안 좋거나(술, 담배, 도박 등)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가 스스로 부끄러운(섹스)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문화적으로 '어른들은 좀더 잘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일정 나이 이상인 사람에게는 규제를 풀어놓은 것 뿐인데
그 '일정 나이'라는 것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를 뿐더러
어른도 제대로 컨트롤 못 하는 게 사실인걸요.
너무 길게 설명드렸습니다만, 요점은,
'나는 미성년자인데 그런 일을 했다, 부끄럽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거에요.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인데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사람들이 '몇몇 살 이상에게만 정상적인 일!' 이라는 딱지를
사회가 멋대로 붙여 놓아버린 것 뿐이니까요.
그럼, 이상으로 상담글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더 이야기하고 싶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상담소에 다시 글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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