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을 드립니다.

nn님, 새 해가 되어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nn님께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네요.

두 명의 친구에게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었고, 그 때의 nn님의 생각과 행동을 되짚어보며 글을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한 친구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한참 진지하게 털어놓았고 한 친구는 그저 추억이 될 만한 일로 기억하며 털어놓았고요. 공통점이라면 두 친구분 모두, 그런 경험을 자신의 성정체성과 연결짓기를 꺼려하거나 연결지을 만 한 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겠네요.

우선 nn님의 대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나는 솔직하지 못했어' 하는 자책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에 '솔직함' 만이 필요했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스스로에게 '이성애자인 척' 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결국 자기 자신이 더욱 힘들어지는 일이지만, 남들앞에서 내 진심이 어떻든 겉으로 이성애자인 척 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건 만약 nn님께서 양성애자나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면 하나의 삶의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nn님께서 상담소에 처음 오셨을 때 만큼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다른 사람들 또한 가지고 있을텐데(어쩌면 그보다 더 좋지 않은 시각을 가졌을지도 모르는데), 확인도 해보지 않고 쉽게 알려줄 수는 없지요.
(물론, 상담소나 성소수자커뮤니티처럼 동성애자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고 트랜스젠더도 함께 하며 그런 편견에 영향받지 않는 환경에서는 처음만난 사람에게 '저는 레즈비언입니다' 한다고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요.)

친구들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지 또한 모르는 일이지요. 동성 친구가 좋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이상한 사람' 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게 웃기다' 하며 희화화 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사람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내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든 상관없이, 그친구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대로 여겨질지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쉽게 '우리는 동지!' 할 수만은 없지요.

무엇보다, 아무리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해도, nn님께서 nn님의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거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저 아무렇지않게 잘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만 먼저 친구의 마음을 진심으로 여겨주기보다 '혼란인지 아닌지' 를 먼저 필터링 하셨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와 친한 것과는 상관없이 잘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혹은 내 고민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곤 합니다. 또, 한 번 겪여보지도 않았으면서 왠지 입이 무겁고 진중할 것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요. 그 친구가 nn님께 고민을 털어놓은 이유도 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주변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했던 것이 그 친구의 의도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날 부담스럽다며 멀리하려고 하는 상황일 때, 이러한 상황을 혼자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만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너무도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조언을 듣고, 그 중에 더욱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 그 이후의 일을 또 이야기하고...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동성의 상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어쩌면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거지?' 하며 바라본다면 편향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이성친구에 대해 이리저리 말하고 다니는 친구에 대해 '그 사람을 진짜 좋아하는 모양이야' 하거나, '여러사람에게 솔직하다' 거나 어쩌면 '입이 가볍다' 정도로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동성애라는 건 왠지모르게, 떠벌려서는 안되는 것,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 것, 자신의 약점이나 치부처럼 정말 친한 사람에게나 알려줄 수 있는 것 등으로 여겨지기 쉽지요. 누군가, "나는 동성애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 하며 말하면서도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사람은 자신이 동성애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체 하고 싶을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친구와 어느정도 신뢰가 형성된다면, 그 친구의 마음이 진심으로 여겨진다면 가끔이라도 nn님이 해줄 수 있는 지지의 말들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 친구더러 상담소로 찾아오라고 전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아마도 nn님께서는 지금 제가 드리는 답변보다 nn님 학교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저도 제가 늘상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주로 영향을 받으며 살 것이고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가장 와닿기 마련이니까요.

nn님의 친구들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nn님께도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지요. 진심으로 동성의 상대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성정체성과는 관련성을 찾지 않는 친구, 동성친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게 한 순간을 넘어 20대, 30대까지 진지하게 이어지는 것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친구...

이런 친구들의 생각이 지금 현재 nn님께서 성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보면, nn님께서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상담소를 찾아오셨을 때보다 지금은 조금 달리 생각하고 계시기에, 또 직접 만나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얻지는 못하지만 글로나마 다른 사례들을 접하고 계시기에, 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열린 시각(혹은 덤덤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이 누구보다 nn님 스스로를 편하게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엔 여기서 줄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1-Y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