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님, 답변을 드립니다.

SP님, 상담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나누게 되어 반갑고 또 다행입니다.

우선 상담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져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렵게 털어놓으신 이야기일텐데, 이제서야 답변을 드리게 되네요.

올려주신 내용을 보니,
동성 친구들을 대할때의 심리적 부담감이나 가족들과의 관계,
커밍아웃 등등 여러 고민들이 담겨있는데
하나하나 짚어가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우선 SP님께서 정체화를 하고 난 이후부터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맺기에 있어
심리적인 부담이 계속 커져왔던 것 같아요.

상담을 하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SP님과 비슷한 심리적 부담을 안고
생활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도 그럴것이
남들이 나를 (어떤 의미에서든) 항상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음의 특성이니까요.

남들이 날 주목하고 있다면, 나에게 찾아온 변화를 남들도 마치 어느정도
알고 있을것이라 여기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내 생각들, 내 말과 행동의 이유들,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는 상황적 맥락들까지도 다른사람이 어느정도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남들 앞에서 실수라도 하나 하면 남들이 그것을 평생동안 기억할거라는 듯이
걱정하기도 하고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어쨌거나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나 에너지를 쓰며 살지는 않으면서도
남들 또한 나에 대해서 그렇게 에너지를 쓰며
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SP님.

나에게서 찾아온 변화가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남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거나,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무턱대고 혐오스러워하는 무언가라면
'남들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한'그 불안함은
더 클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만약 성정체성의 차이가 잘 받아들여지는 사회였다면
내가 어제까지 이성애자였다가 오늘 아침에 동성애자로 정체화했다고 해서   
친구들 앞에 서기가 불안하거나, 내가 그들을 속이고 있다거나...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내가 먼저 말이라도 꺼내야만,
다른사람이 그제서야 '아, 그랬구나' 할 수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요.


SP님께서 가지고 있는 심리적 부담은
아마도 친구들에겐 솔직해야하는데.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친구들이 내가 이런사람인 걸 알면 나와 함께하지 않을텐데.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아닌척 해야할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는 부담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모든 것들이 다 얽혀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상담원은 SP님께서 정체화 한 이후로, 나를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해왔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해요.


우리가 '나는 동성애자야' 하고 정체화하는 것이 곧 동성애자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닐꺼에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편으로
내가 무슨 이유때문에 동성애자인건지
동성애자가 아니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등을 굳이 따져묻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동성애자인 나 자신이 꽤 괜찮아. 하고 자긍심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남들이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나쁘게 생각하든, 그건 편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해요.

그렇기에,
내가 남들에게 내 정체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거짓말하고싶거나
나를 위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들의 편견이나 혐오때문에 내가 상처받거나
피해 입지 않기 위해서 취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내가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쩌면 정체성을 고민하고 결정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내가 동성애자로서 남들과 어울리면서도 건강하게 살아나가려면
내가 먼저 단단해지려 노력을 해야하는 것 같아요.

동성애와 관련된 공부든, 영화든, 온라인 게시판의 사람들의 글이든
나와 관련된 이야기에 나를 포함시켜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통할 기회를 가져보세요.

또, 약간이라도 좋으니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그래서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줄 사람들을 찾아볼 용기를 내 보셨으면 좋겠어요.

평생 어떻게 살지, 커밍아웃은 어떻게 하지,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지낼지
모든게 어둡기만할 때 그저 나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나보는

것 만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너무나도 많은 동성애자들이,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들로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저 알고만 있어도, 많은 용기를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이성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당장 편하지 않다면, 당분간 거리를 두어도 나쁘지
않아요. 편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 어떻게든 끼어 있으면서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애써 힘들이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익명의 상담이 가능한 곳은, 사실상 온라인상담을 운영하는 곳 밖에는 없는데
저희 상담소가 아닌 다른 곳은 알고 있지 못해요.

게이인권운동단체인 <친구사이>에서는 전화상담을 하고 있는데, 내담자가 원하지 않는
한 신변을 노출시키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상담 내용에 대해서도
상담자와 내담자간 철저한 비밀유지의무가 있으니 용기를 내어보셨으면 해요.

물론 이곳에라도 얼마든지,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