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유감님께

시대유감님, 상담소입니다.
님의 안타까웠던 상황을
상담원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후 시간이 꽤 흘렀네요.

지금도 어머니가 계신 집이 아니라
밖에서 생활하고 계시다고요.
최근 들어 집에 들어갈까 하는
고민이 생겼나 봐요.

그런데 집에 들어갈까 하는 마음에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다고요.
그것은 이전에 사귀었던 분과의
관계 문제이군요.

그분과 헤어질 수 없기에
엄마의 말을 어기고
집을 나와야 했던 것인데,
결국 그분과는 헤어지게 되었고,
이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 것도 보상받지 못했다'는
감정을 들게 하나 봐요.

그런 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과감한 선택을 했던 만큼,
그 선택이 님이 생각했던 대로
좋은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더 큰 미련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와의 이별과 애인과의 이별,
모두를 견뎌내느라 많이 지치셨을 님께
격려와 지지의 말씀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님.
님의 글을 읽으며,
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전 애인분을 다시 만나는 것',
이 두가지를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집으로 들어가면 애인을 만날 수 없고,
애인을 만나면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물론 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어머니께서는
님의 동성애자 정체성에 대해
굉장히 혐오하고 반대하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님.
집으로 들어가면
어머니 뜻에만 따라야 하고,
애인을 만나면
사랑에만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다보면요.
가장 중요한 '님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뒷전이 되지 않을런지요?
상담원은 그런 걱정이 들어요.

님께서는
스스로가 의지박약이고 변덕이 심해서
혼자 결정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셨지만요.
상담원이 생각하기에 님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분인 것 같아요.

상담원이 님의 인생을
대신 결정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상담원은 님 스스로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서
님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님의 행복에는
사랑도 포함이 될 것이고,
어머니와의 관계나 안정적인 환경도
포함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현재 님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
더 비중있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선택을 했을 때
님이 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져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그 선택으로 인해
다른 선택을 아예
포기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이를테면 집에 들어간다고
님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포기한다거나,
애인을 다시 만난다고 해서
엄마에게 다시 연락해보고자 했던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다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님의 행복에는
사랑과 가족, 환경이
모두 포함될 수 있잖아요.

이전에 님이 애인분과의 관계를 위해
집을 나왔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달라졌으니까요.
어머니와 다시 이야기해볼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러한 가능성을 알아보지 않은 채
어머니에게 정체성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요.
언젠가 다시금
동성의 상대와 사랑하게 되었을 때
지금과 똑같은 갈등이 반복될 수 있잖아요.

님에게 현재 더 필요하고 소중한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더라도,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아예 접기 보다는
계속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님. 우울증, 조울증이 있는 것 같고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복잡한 심경이시라고요.

상담원도 님의 신변과 심리상태가
많이 염려 되어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스무살, 스물 한 살의 여성이
별다른 지원 없이 홀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위험한 환경이니까요.

님이 건강할 수 있는 길,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나가셨으면 좋겠어요.

다행인 것은
님께서 티지넷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고
친구들과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에요.

심리가 불안정하거나
많이 외로움을 느낄 때에는,
적극적으로 레즈비언 커뮤니티나
친구들의 지원을 받으셨으면 해요.

상담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주저 말고 찾아주시고요.

그럼 님. 이만 상담을 마칠게요.

님의 건강을 응원하고 있을 게요.

힘내세요 !

-20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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