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ㄹㅎ 님, 상담원이어요.
작년 가을에 글을 남기셨는데
올해도 다 지나서야 이렇게 답변 드리게 되었어요.
너무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는 고교 3학년도 다 마치고
또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이겠어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요.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는 심정이 어떤지도 궁금하고요.
글 남기시던 당시에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으셨는데
저희가 상담을 미처 못 해드리고 있던 지난 일 년여 간
ㄱㄹㅎ 님이 이미 여러 방법을 찾아내셨을 수 있겠다 싶어요.
답변이 많이 늦어서
지금 ㄱㄹㅎ 님에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정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래 상담글을 이어나가 볼게요.
여자 친구를 만들려면
커밍아웃을 일단 해야 하는 거냐는 질문을
덧붙이셨는데요.
커밍아웃을 먼저 하고
여자 친구 후보(!)들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 사람과 교제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커밍아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레즈비언인지 바이섹슈얼인지
여전히 고민 중이고 탐색 중인 가운데서도
누가 좋아져버릴 수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정체성 탐색은 그것대로 해 나가되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은 또 그것대로 키우게 되겠죠?
나한테 무슨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지 자체는 불분명 하더라도
그 사람이 좋은 마음만큼은 너무나 확실할 수 있으니까요.
이럴 경우
내가 상대방에게 고백을 하며
교제를 청한다면
그건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어요.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자체를 밝히는 건 아니라 해도 말여요.
내가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
내가 너한테 호감이 있다
나는 너와 사귀고 싶다, 는 의사 표현에
나는 여자로서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다, 라는 게
담겨 있는 거죠.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나는 양성애자입니다,
나는 범성애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이 커밍아웃인 건 아니거든요.
내가 동성에게 끌리는 사람이라는 점 자체가
규범으로서의 이성애를 벗어난 거니까
그걸 드러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커밍아웃인 셈이랄까요.
단 ㄱㄹㅎ 님이 궁금하신 게
여성 간의 연애는
레즈비언이라고 스스로를 명확히 정체화 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가 레즈비언임을 밝힌 상태에서만 (혹은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이나 판섹슈얼 사이에서만)
시작이 가능한 거냐는 거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왜냐면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정체화 (자기 규정) 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끌림이나 연애가 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끌림이나 연애 경험 등을 하면서
그것에 스스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정체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고교 시절에
같은 반 친구끼리
서로 좋아하게 되면서
그 감정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각자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도 시작하게 될 수
있는 거거든요.
ㄱㄹㅎ 님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 혹시 없어요?
누군가가 좋다면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보셔요.
만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누군가와 사귀어 보고 싶다면
SNS 에서 퀴어 계정을 찾아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친분도 쌓고 만남도 추진해 보고
그래 보셔도 좋겠어요.
당장 연애가 급하다기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두루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싶으면
상담소 즐겨찾기에서나
SNS 관련 계정 등을 통해
성소수자/퀴어 단체나 모임의 행사 소식을 찾아
거기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셔도 좋고요.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내 인연을 만날지 모르니
일상 생활 속에서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 보셔요.
상대방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 바이섹슈얼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더라도
좋아진다면 다가가 볼 수 있는 거랍니다.
누구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의 변화를 겪을 수 있어요.
ㄱㄹㅎ 님이 표한 호감을 계기로
상대방도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할 수 있는 거고요.
절대 확고한 이성애자라면
내 쪽에서 아무리 좋아해도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겠죠?
그런데
그 가능성이 없는 거나
내가 좋아하는 동성애자가
나는 너한테 친구 이상으로는 관심없는데, 라고 거절할 가능성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동성애자끼리라고 해서
누가 누구한테 고백만 하면
당장 사귀게 되고 그러는 게
전혀 아니니까요.
그러니
누군가가 좋아지면
그 사람 정체성을 모른다 하더라도
한번 쯤 다가가 보는 거
전혀 나쁘지 않아요.
물론 거절은 바로 납득하고
깨끗이 물러나는 게 예의라는 점,
기억해 주시고요.
상담원이 드린 말씀이
ㄱㄹㅎ 님이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많이 늦어버린 상담글을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상담원이었습니다.
20181229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