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님, 상담원이어요.
답변이 너무 늦었어요.
이달 초에 글을 남기셨는데 벌써 칠월도 하순이잖아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단짝 친구를 좋아하며
마음 앓이가 크다고 적으셨어요.
혼자서만 담아두기에는 감정이 너무 깊고 뜨거운데
말을 꺼내보자니 친구 관계마저 어그러지지 않을까 두렵다는 호소네요.
가망도 없고 의미도 없다면
계속 좋아해서 뭐하나
단념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시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이렇게 아무 말도 못 해보고
조용히 억눌러서 끝내야만 하는 일일까 싶어
서글프시기도 하고요.
그냥 적당히 아는 사이거나
별로 친한 상대가 아니라면
오히려 고민이 덜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상대가 너무나 소중한 친구인 만큼
이를 어쩌지 어쩌면 좋지
더욱 막막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연애 감정을 털어놓았다가
연애를 이루는 건 고사하고
도리어 절친한 존재를 잃고 끝나는 결말이 되어버리면
너무 괴로우실 테니 말여요.
상대방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까
메모 님이 고백을 한다면
아마 메모 님의 감정은 십분 존중해 주겠죠.
최소한 존중하기 위해 노력은 해 주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건 참 다행이어요.
메모 님이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지금 상대방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나 적대에 노출되어 함부로 다뤄지지
않을 테니까요.
여느 사랑이나 고백에서와 다름없이
애틋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다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메모 님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친구가 메모 님을 이상하게 보거나 싫어하거나 기피하지는
않을 것임을 믿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고백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결코 크다고는 하기 어렵겠지요.
친구가 이성애자인 게 분명하다면 말여요.
그렇다면 메모 님은
고백을 하고자 하신다면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을 꺼내는 편이
고백 이후 메모 님 스스로를 보살피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고백은 메모 님이 하는 거지만
거기 어떻게 반응할지는 상대방 몫이니까
친구가 그 몫을 제대로 쓰도록
메모 님 쪽에서 존중만 해 주시면 돼요.
친구가 메모 님 고백을 귀담아 들어주었다면
그리고 성실히 정성스럽게 반응하였다면
메모 님은 친구의 의사를 기꺼이 납득해 주시는 거죠.
친구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는 거예요.
그게 메모 님에게 마음 아픈 결론일지라도 말여요.
그런데 말이죠, 메모 님.
고백과 거절이 지나간 친구 사이라고 해서
그 관계가 반드시 나빠지거나 허물어지리라는 법은 없답니다.
오히려 더욱 돈독해질 수도 있어요.
솔직한 고백과 정중한 거절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한다면요.
고백한 사람 쪽에서는
상대방을 더는 욕심내지 않도록 마음 먹고
부담주지 않도록 처신에 신경을 쓰는 식으로
노력하는 게 좋을 거고요.
고백을 받고 거절한 사람 쪽에서는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거나
불필요하게 눈치보며 어색해 하거나
그러지 않는 식으로
노력하면 좋을 거예요.
뭔가 서로 오해하나 싶을 때면
이전보다 훨씬 더 진솔하게 터놓고 얘기해서 풀기 위해
머리와 마음을 맞댈 필요가 있을 거고요.
서로 이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
이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다, 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노력하다보면
그런 어려운 시간을 같이 통과한 동지의식마저
공유하게 될 수 있답니다.
그런 경우, 없지 않아요.
적지 않고요.
이는 친구가 이성애자인 것과는
무관하다고 봐도 좋을 이야기 같아요.
상대가 양성애자거나 동성애자라는 거 자체가
내가 고백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 줄 가능성 자체를
키워주는 건 아니니까요.
(이성애자끼리의 고백이
늘 연인 관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여요.)
그리고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한 사람의 성적지향-성정체성이
한번 형성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일생동안 고스란히 유지되는 건 아니랍니다.
누구든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
재규정하게 될 수 있어요.
메모 님 단짝 친구가
아무리 이성애자라 해도
절친한 동성 친구한테 고백을 받으면
그 고백을 계기로 고백한 친구를
다시 볼 가능성이
절대로 아예 없지 않다는 이야기여요.
친구라는 이름으로만 불렀던 관계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 보려는 의지를
가져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비현실적인 희망을 심어드리려는 게 아녀요.
잘 될 거라는 기대를 가져 보시라고 부추기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아주 큰 가능성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거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뚜껑을 열어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거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이미 생겨나버린 감정을 어떻게 애써 없애겠어요.
설레고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 억지로 잠재우겠어요.
이미 커져버린 마음은 잦아들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시간이 가고 마음이 정리되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보고 돌봐줄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안 좋아하려고 애쓰시기보다
좋은 만큼 좋아하되
그러면서 받는 기쁨은 더 잘 간직하고
그러면서 받는 상처는 더 세심하게 돌보는 데
주력하시면 어떨까요.
친구를 향한 마음을 감당해 나가시면서
혼자서는 아무래도 벅차다 싶을 때면
언제고 다시 이곳 게시판 찾아 사연 나눠 주셔요.
상담원이 세심하게 살펴 격려해 드릴게요.
메모 님의 짝사랑을 응원하며,
오늘 답변은 이만 줄입니다.
상담원이었습니다.
20170721H